봄기운이 코끝을 간질이는 이맘때면, 대학교에 갓 입학하던 그때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겨우내 곰팡내 나던 이불을 밝은 봄 햇볕 아래 시원스레 털어 말리는 느낌, 새내기 대학생이 되었을 때 기분이 꼭 그랬다. 그동안 좁디좁은 교실 책상 위에 꾹꾹 눌러두어야 했던 내 젊음의 끼를 드디어 마음껏 발산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된 것이다. 해보고 싶었던 것은 너무나 많았지만, 일단 대학생으로서 가장 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바로 성인의 상징, 파마머리와 뾰족구두였다. 샛노란 스웨터를 청바지에 받쳐 입고 갓 볶아낸 파마 컬을 살랑살랑 흔들면서 또각또각 구두소리도 경쾌하게 거리를 누볐다. 물론 강의일정표가 꽂혀진 커다란 바인더노트를 품에 꼭 안고서였다. 그때 난 진정 자유인이었다.
이번 봄, 나는 다시 대학 새내기가 된 기분으로 학교로 향한다. 좋아하는 책 한권 읽기도 쉽지 않은 요즘이지만, 거리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보니 끓어오르는 자유 본능을 참을 수 없었다. 단, 일도 해야 하고 아기도 키워야 하는 열악한 처지에 맞게 한 인문학습원에서 개설한 단기 강좌에 등록했다. 지인의 소개로‘그리스 학교’라는 인문학 강좌가 개설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마자, 평소 별 관심도 없었던 그리스에 대한 사랑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인터넷 서점을 뒤져 그리스 문화와 철학에 대한 책을 몇 권 사고, 책장에서 푹 묵혀두었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꺼내 들었다. 출퇴근 시간을 이용해 짬짬이 워밍업을 하고, 드디어 첫 수업을 맞았다. 일을 마치고 강의실로 부랴부랴 뛰어가고 있노라니, 집에서 엄마를 몹시 기다리고 있을 아기의 얼굴이 스쳐갔지만 애써 외면했다. 좋은 양육은 양이 아니라 질이라는 명언을 계속 되뇌면서…. 하지만 그 일말의 죄책감도 수업이 시작됨과 동시에 사라졌다. 실로 오랜만에 만끽하는 나만의 행복한 자유로움이었다.
서른명 남짓한 학생들을 앞에 두고 자그마한 체구의 교수님이 강단에 오르셨다.
우리나라 최초로 그리스 아테네 대학에서 유학을 한 후, 평생 그리스에 미쳐 살아오셨다는 그리스학의 대가였다. ‘왜 우리가 그리스학을 배워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한 그의 강의는 마치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것 같았다. 그 지성과 열정에 매료되어 강의 내내 찌릿찌릿한 소름이 돋았다. 두 시간의 강의만으로도 그가 왜 평생 그리스에 빠져 살아왔는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고, 가능하다면 나도 그 길에 동참하고 싶을 정도였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내가 동경해 마지않는 자유인의 모습이 바로 고대 그리스인들의 삶의 방식, 그 자체였다는 점이다. 돈과 권력의 노예가 되느니 기꺼이 명예로운 죽음을 택했고, 그저 살아가기에 급급한 것이 아니라‘잘 사는 것’의 의미를 추구했다. 자신이 하고 싶은 바를 명확히 알고, 그것을 할 자유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줄 아는 철학자들이었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를 보고 조르바처럼 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팔딱이는 심장 소리에 맞춰 춤을 추며 매순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자유롭게 떠도는 방랑자, 누군가 내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순간 가차 없이 결별을 선언하고 길을 나서는 자유인, 그런 삶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유쾌한지 모른다. 비록 지금의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잠깐의 일탈로도 버거운 직장인이고 주부이지만, 마음만은 언제나 자유인의 길 위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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