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다보면 의외로 외화가 한국영화 보다 편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한국영화를 보노라면 우리 현실에 맞지 않는 배경이나 이야기 전개 때문에 마음이 불편해지기 때문이다. “아니, 강남역에서 저 시간대에 택시를 저렇게 쉽게 잡을 수 있나?” 하는 식이다.
이에 반해 외화의 경우는, 그야 말로 제멋대로 만든 영화여서 인류 공통의 생활습관에 반하는 경우만 아니라면 “저 나라에서는 저런가 보다”하고 양해하게 되니 마음 불편해 할 일이 훨씬 적다.
영화를 보면서 직업 때문에 느끼게 되는 어색함도 이와 유사한 경우이다. 메디컬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고 옆에서 같이 보다가 의사 친구가 온갖 의학상식과 병원 관행을 들먹이며 비판을 늘어놓는 경우가 있다. 그런 말을 듣고 있으면 ‘의료에 관한 강의를 하는 것도 아닌데, 그냥 보면 되지, 잘난 척 하기는’ 하는 식의 기분이 들게 마련이다. 그런데 만일 그 영화가 법정 공방을 다루는 한국 영화라면 이번에는 내가 그 옥의 티들을 참지 못하고 불평을 늘어놓을 것이다. 그런 흠들은 생각보다 참기 어려운, 목의 가시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사법절차를 다루는 한국영화가 무척 많아졌다. 법조인에 호감을 가지고 묘사하는 영화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을 보면, 법조인 인기가 좋아져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가장 좋게 묘사해봤자 원칙만을 강조하는, 앞뒤가 꽉 막힌 관료의 모습, 레미제라블의 자베르 정도가 아닌가 싶다.
게다가 배경이 되는 법조사회에 대하여 깊이 알아보고 만드는 것 같지도 않다. 그러다 보니 법조 관련 한국영화를 보노라면 법조인만이 느끼는 이중고로 곤혹스러울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같이 보는 아내 보기가 민망할 정도로 부패하고 탐욕스럽게 묘사되는 것도 불편한데다가 실제와는 너무나 동떨어지게 묘사되는 영화 속 법정 장면을 바라보며 남이 저지른 오류에 내가 답답해해야 하는 고통까지 겪어야 하는 것이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변협신문처럼 법조인들끼리 보는 신문이 아니면 마음 편하게 하기도 어렵다. 주변에 그런 이야기 해봐야 예술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꽉 막힌 변호사들이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소리나 들을 터이니 그냥 잠자코 있는 것이 낫다. 법조인이 아닌 척하는 것도 한 방법이지만 스스로를 속일 수는 없으니 마음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불편하게 하는 것들 중에서도 끝까지 이해하고 넘어가 줄 수 없는 것은 의외로 법조인들만이 볼 수 있는 소소한 오류들, 그 많은 옥의 티들이다. 법조인 중에 질 나쁜 사람 한둘 없으란 법 없는 것이고, 작가란 필요하면 어느 정도의 과장도 할 수 있는 것이니까라고 생각하면 사악하게 묘사한 부분은 의외로 쉽게 넘어갈 수 있다.
그런데, 재심사건 판결을 선고하며 “파기환송하고, 무죄를 선고한다”는 식의 주문을 읽는 것과 같은, 무성의에서 비롯된 오류는 정말 떨치기 어려운 불편함을 준다. 정말 목의 가시 같다. 이런 식의 오류는 영화의 격이나 관객에 대한 예의와 관계되는 것이어서 관객 입장에서는 무시당한 기분까지 느끼게 된다.
최근에 본 영화 중에는 법정 공방과 함께 교도소 생활을 다룬 영화가 있었다. 어찌나 슬프던지 나올 때는 흘린 눈물 때문에 눈가가 쓰라릴 지경이었다. 그러데 영화를 보는 동안은 내내 ‘사법연수원에서 저런 식으로 모의재판을 할 리가 있나’ ‘저런 심신미약자에게 사형이라니’ ‘사형수를 교도소에서 저렇게 관리하지는 않을텐데’ ‘저런 엉터리 판결주문이 어디 있어’ 하는 생각에 영화에 집중하기가 정말 어려웠다.
‘법정영화를 만들면서 변호사의 자문도 구하지 않다니, 참 한심하군 하는 생각이 줄곧 마음 한쪽에 남아 있어 가끔은 이름도 모르는 감독을 비난했다.
그런데 눈물을 흘린 것도 쑥스럽고 해서 영화가 끝난 후 곧바로 일어나지 못하고 엔딩 자막을 보며 앉아 있는데, 아니 자막에 법률자문을 해준 변호사 이름이 나오는 것 아닌가?
“아니, 그러면?” 자문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자문을 해 주어도 말이 먹히질 않았던 것인지는 몰라도 나를 불편하게 한 당사자가 법조 식구일수도 있다는 것인가… 영화 볼 때 변호사라서 괴로운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나는 순간이다.


 

저작권자 © 법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