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땅 삼경이면 밤마다 찬서리고 / 어버이 한숨 쉬는 새벽달일세 / 피눈물로 한줄한줄 간양록을 적으니 / 임 그린 뜻 바다 되어 하늘에 닿을세라
조용필이 부른 ‘간양록’입니다. 애절한 가사에 가슴 밑창에서부터 쥐어짜듯 치솟아 오르는 격정을 담은 노래로 TV드라마의 주제곡이기도 합니다. 이 간양록의 주인공이 바로 조선 중기의 선비 수은(睡隱) 강항(姜沆)선생입니다. 전남 영광군 불갑면에서 태어난 선생은 세조 때의 문장가인 강희맹의 5대손으로 일곱살 때 맹자 한질을 하룻밤 사이 독파하였다는 신동이었습니다. 27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좌랑으로 있던 1597년 정유재란 때 향리에서 왜장 토도 타카토라(藤堂高虎)군에게 포로로 붙잡혀 두 형과 함께 일본으로 압송됩니다. 강항이 끌려간 곳은 토도가 성주로 있던 지금의 시코쿠 에히메현의 오즈(大洲)시였습니다. ‘간양록’은 강항이 이때 보고 들은 왜국의 실상과 왜인들의 무지한 모습을 소상히 적어 선조 임금에게 올리는 형식의 글입니다.
지난 3월 초 나는 역사문화탐방의 일환으로 아내와 둘이서 일본 시코쿠 지방을 찾았습니다. 에히메현의 현청 소재지인 마쓰야마(松山),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30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는 도고온천이 있는 곳입니다. 마쓰야마 역에 도착하자마자 특급열차로 40분 거리에 있는 오즈시로 달려갔습니다. 풍치가 아름답고 수려하여 작은 교토라 불리는 오즈시, 그 역에서 택시로 15분, 오즈시민회관 앞에 있는 강항 선생의 현창비 앞에서 옷깃을 여몄습니다.
강항은 이곳 오즈성에서 억류생활을 하면서 탈출을 시도하다 붙잡혔으나 그의 문재를 아낀 승려 가이케이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기도 합니다. 그의 고매한 학식이 널리 알려져 교토에 있는 후시미성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고 그는 그곳에서 후에 일본 주자학의 개조가 되는 승려 후지와라 세이카를 만납니다. 후지와라는 강항의 제자가 되어 강항이 친필로 써준 사서오경에 왜인들이 읽을 수 있도록 ‘왜훈’을 달아 일본 유학을 싹트게 합니다. 강항은 후지와라의 도움으로 억류생활 4년 만인 1600년에 귀국하였고, 그 후 조정에서 내린 두 차례의 관직을 마다하고 향리에서 여생을 마칩니다.
강항이 포로로 머물렀던 오즈시에서는 그와의 인연을 기리기 위하여 현창비를 세우고 그 왼편에 한글과 일본어로 된 똑같은 크기의 비석문을 따로 세워 ‘일본 주자학의 아버지 유학자 강항’이라고 새기고 있습니다.
화강암으로 된 현창비는 벌써 검게 변해가고 있었고 비석 앞 제단 분향대는 빗물과 돌로 메워져 있었습니다. 나는 분양대를 청소한 후 인근 가게에서 꽃 한 다발을 사다가 꽂고 묵념을 올렸습니다. 3월 초인데도 주변의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있었습니다. 마침 토요일이라 시민회관의 당직 관리자를 찾았습니다. 일년이면 한국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고 힘주어 말하는 것을 듣고 기분이 착잡했습니다.
마쓰야마는 인천공항과 정기항공편이 있어 많은 한국인들이 찾는 곳입니다. 더욱이 이곳은 일본의 국민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도련님’의 무대이자 시바 료타로의 ‘언덕위의 구름’의 주인공으로서 근대 일본 자존심의 상징적 인물인 아키야마 형제와 마사오카 시키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그곳으로부터 불과 1시간 거리에 포로의 신분으로서도 꿋꿋하게 절개를 지키면서 왜국의 지성을 일깨워준 우리 선비의 발자취가 있습니다. 마쓰야마 아니 시코쿠 지방까지 갔다면 한번 찾아가 봄직하지 않은가! ‘간양록’과 서애 유성룡이 쓴 ‘징비록’을 읽으면서 말입니다. 역사를 알고 여행을 하는 자는 인생을 두배로 산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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