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어느 종편 토크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되었는데 생각지 못한데서 논쟁이 붙어 30초만, 2초만 이야기하겠다고 난리가 나서 사회자가 사회를 볼 수 없을 지경이 됐던 적이 있었다.
사연인 즉 여자 출연자 한분이 40여 년 전 시집을 간 뒤 시누이와 시댁 식구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여 십여년을 시집살이를 했는데도 ‘며느리’ ‘언니’로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살았다며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하였다. 자신은 이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몫을 다하며 최선을 다했고, 시누이가 시집 갈 때 자신이 빚까지 내어 혼수를 다 장만해주었더니 시누이로부터 신혼살림 집들이에 초대받았고 그제야 ‘언니 고마워’란 소리를 듣게 되었다. 지난 세월을 보상받은 듯하여 너무 감격한 나머지 돌아오는 길에 골목에 차를 대고 ‘해냈다’라며 스스로를 칭찬하였다고 이야기를 맺었다.
모두에게 감동의 박수를 받을 것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이야기를 마치자마자 젊은 정신과 의사 선생님이 ‘왜 그렇게 사셨느냐? 정말 이해가 안 된다. 왜 시댁에 인정받아야 하는가?’라고 질문을 던졌고 이 질문에 옆에 있던 분들이 같이 흥분을 하면서 순식간에 패널들이 두 갈래로 나뉘어 세대 간 논쟁을 벌이게 된 것이다.
아직 우리 사회는 시월드 논쟁이 사라지지 않은 듯하다. 그날 사건으로 먼저 확인되는 것은 우리 엄마나 이모쯤 되는 세대의 억울함이었다. ‘나는 이렇게 참고 살았는데 이제 너희들은 왜 못 참느냐, 참는 것이 얼마나 미덕이고 그래서 내가 가정을 유지하고 산 것에 대하여 왜 젊은 너희들은 인정해주지 않고 오히려 잘못 살았다고 하느냐’는 것이다. 여기에 젊은 세대는 ‘그래서 당신이 행복했느냐 그러지 않았으면서 미덕인 것 마냥 아래 세대에게 강요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둘 다 맞기도 하고 맞지 않기도 한 이야기다.
‘결혼’이란 제도가 ‘가족’ 간의 결합에서 ‘남녀’간의 결합으로 인식되어 가고 있는 모습이다. 전혀 다른 사람을 가족으로 받아들여 내 사람으로 만들고, 전혀 다른 나를 그 집안에 맞추려 노력했던 세대가 꾸려낸 가정이, 아이들을 위하여 참으며 부부인 척 했던 가정이 마침내 승화해 화목한 가정으로 끝난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름뿐인 가정으로 남아 오히려 자식들에게 제대로 된 부부의 상을 심어주지 못해 자식 세대까지 왜곡된 모습을 반복하는 모습을 보아왔기에 그런 것은 아닐까. 아니면 우리의 ‘사람됨’ 자체가 변해서 그러한 것일까. 물론 부부 당사자가 아닌 다른 가족 구성원으로 인해서 부부관계가 좌지우지 된다면 그것은 고쳐져야 할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그것도 보다 근본적으로는 부부 두 사람의 관계가 바로 서는 연습을 하지 못해서이지 않을까.
이제는 결혼이 선택인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다. 그래서 행복하지 않은 상태를 견딜 이유가 없기도 해 보인다. 그러나 행복이란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조금 다르게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버드 대학 졸업생들을 추적연구하면서 ‘행복의 조건’이 무엇인지를 연구한 책을 읽었던 적이 있다. 모두 다 어려움을 겪는다. 그런데 그 어려움을 잘 ‘견뎌내는 태도’에 따라 여생을 행복으로 마감하기도 하고 자살로 마감하기도 했다. 그리고 잘 견뎌내는데 가족이 절대적 역할을 했다는 내용도 있었다.
행복이란 어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어려움을 잘 견뎌내는 상태가 아닌가 한다. 그래서 어려움을 겪지 않으려 피해 다니고 포기하기보다는 잘 참고 견뎌 낸 부모님들의 지혜를 들여다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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