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3개월 가까이 되었던 긴 겨울방학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12월 초 패기 넘치게 세웠던 계획들의 실천여부를 두고 반성하거나 뿌듯해하는 일은 차치하고, 이제는 다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해야 할 시점이다.
학업에 대한 부담감에 있어서는 학기 중과 방학 기간이 크게 다를 바가 없지만, 그래도 우리는 방학이 있어 잠시나마 가족들의 품에서 재충전의 시간을 갖기도 하고, 그동안 엄두가 나지 않아 만남을 미루기만 했던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그리고 이제는 그 시간이 언제나 주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잘 알기에 어느 때보다 열심히 그 시간에 임한다.
방학이 되어도 일상에 큰 변화는 없다. 이무너(‘이무너’는 한국외국어대학교가 위치한 ‘이문동’과 사람을 뜻하는 접미사 ‘er’의 합성어로서, 로스쿨 내부에서 이문동에 자취하는 로스쿨생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곤 한다)로서의 삶은 항상 내가 로스쿨생이라는 자각을 하게 한다. 사법시험 준비생들에게 신림동이 있다면 로스쿨생들에게는 학교가 바로 그런 의미이다. 학부 때나 일반 대학원 시절과는 달리 우리는 학교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고, 학교 담 바로 너머에서 잠을 청한다. 학교는 단지 배움의 장소가 아니라 삶의 터전인 것이다.
학기 중에도 모든 동기들이 학교 기숙사와 학교 주변에 나와 사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경우가 그렇고, 집에서 등하교 하는 친구들도 시험기간에는 학교 주변 고시원 등에 잠시 머무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리고 방학이 되어도 가끔 집에 다녀오는 경우가 아니면 거의 학교 주변에서 동기들을 만날 수가 있다. 어머니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군대 아닌 군대에 와 있는 것과 다름없다. 언제고 마음먹으면 못 갈 곳이 없지만, 그 자유를 그저 자유롭게 누릴 수만은 없는 것이다.
가슴 터질 듯 벅찼던 로스쿨 합격 소식을 듣고 이문동으로 처음 이사오던 날이 새삼 생각이 난다. 몇 번 와보지 않았던 생소한 곳이었지만, 신입생의 마음은 난생처음 눈을 만나 마냥 들뜬 강아지와 같았다. 그 당시 이문동을 통틀어 유일하게 아는 분이었던 친절한 부동산 아저씨의 안내로 겨우겨우 찾아간 이마트에서 필요한 물건들을 사고 돌아오는 길에 보았던 Sea Sea World, 매운 족발집, 썬더치킨, 일촌분식… 이제는 이런 풍경이 눈에 들어오고서야 “아이고, 집에 다 왔구나” 싶은 안도감이 들 정도로 정겨운 나의 동네가 되었다.
이무너는 하루라도 동기를 보지 못하면 눈에 가시가 돋는다. 며칠 전이었다. 친한 친구 언니 결혼식에 늦을까 부랴부랴 준비를 마치고 집에서 나와 걸음을 재촉하던 때였다. 집이 위치한 골목과 학교 후문길이 만나 있는 삼거리에서 ‘빵빵!’ 소리가 들려왔다. 옆을 보니 동기가 차 창문을 내리며 “누나,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넨다. 오랜만에 보는 동기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나는 학교 쪽문을 지나 뛰기 시작했다. 얼마나 뛰었을까, 학교 농구코트에 낯익은 얼굴들이 보인다. 동기들은 농구에 여념이 없어 바로 옆을 지나가는 나를 보지 못한다. 나도 정신없는 터라 눈짓으로 찡긋 인사를 보내고 다시 정류장으로 향한다. 나를 강남까지 데려다 줄 147번 버스의 도착시간이 2분 남짓 남았을 무렵, 맞은편에 동기커플이 다정하게 지나가는 모습이 보인다. 버스에 올라앉은 나는 그들에게 톡으로 인사를 건넸다. 내가 버스정류장까지 가는 10분도 채 안 되는 시간동안 나는 우리 동기들 중 5분의 1과 마주친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문동에는 비밀이 없다. 공공연한 비밀도 시한부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이성친구와 점심식사를 하는 동안 5명의 동기와 아무런 약속 없이 마주칠 수 있는 곳이 이문동이다. 처음에는 이런 상황이 조금은 답답하기도 하고 빨리 적응하기 어렵기도 했지만, 이문동에서 ‘함께 살아가는’ 동기들이 없었다면 이곳은 언제까지고 나에게 낯설기만 한 타지였을 것이다. 여기에는 혼자 집에서 밥을 먹기 싫은 날이면 언제고 전화 한통에 달려 나와 줄 동기들이 있고, 집에서 동강 듣는 것이 지겨워 오랜만에 열람실에 들르면 언제나 그 곳에는 열공 중인 동기들이 있다.
“로스쿨은 무엇보다 힘든 세월을 함께 헤쳐나갈 동기들이 있어 결코 쉽지 않은 이 과정을 잘 마칠 수 있는 것 같다.” 언젠가 사법시험을 준비하다 로스쿨에 진학한 동기가 내게 했던 말이다. 그때는 로스쿨에 진학한지 갓 2달도 되지 않았던 터라 ‘그렇겠구나’ 막연한 긍정 정도였지만, 2학년을 코앞에 둔 지금은 그 말에 절절한 공감을 보낸다.
로스쿨에서의 동기는 일반적인 동기와 다르다. 우리는 부정할 수 없는 경쟁자이지만, 서로가 최고기량을 발휘하게끔 하는 ‘선의의’ 경쟁자임에 분명하며, 힘든 길을 함께 가는 전우이자 앞으로도 같은 분야에서 활약할 동지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나의 이웃이며 같은 이문동 주민이다.
우리는 오늘도 좁은 이문동에서 함께 공부하고 밥을 먹으며, 서로의 고민을 나누고,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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