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 해질녘이 되면 어머니는 내 고사리 손을 이끌고 당산에 올랐다. 보름달을 보면서 소원을 빌기 위해서이다. 강 건너 멀리 산자락이 붉어오고 보름달이 떠오르면, 어머니는 들릴 듯 말 듯 혼자 소리로 두손 모아 정성스레 소원을 비셨다. 한참이나 지나 달이 산위로 높이 치솟은 다음에야 기도를 마치고는 두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달집태우기, 부스럼 깨물기 같은 행사보다도 어머니의 달맞이 기도가 유년기의 나에게는 더욱 특별한 의식이었다. 그 의식은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초등학교를 마칠 때까지는 계속되었던 듯하다. 아마도 내가 온갖 터부(Taboo)를 미신적이라 의심하기 시작할 무렵의 나이였으리라.
어린시절, 겨울이면 금호강가에서 연을 날렸다. 신문지와 싸릿대로 만든 연은 무명실에 매달려 있다가 맥을 못 추고 추락하기 일쑤였다. 무명실이 툭 끊어져 꽁꽁 언 강바닥으로 연이 내동댕이쳐질 때면 내 마음도 함께 나뒹굴었다. 연날리기는 동네 녀석들과의 자존심싸움이기도 했다. 축 늘어진 어깨로 패잔병처럼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던 그 겨울의 연 날리기는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있다. 바느질용 실이나 그중에서도 이불을 꿰매는 제법 두꺼운 실만 있어도 최고였던 그때, 뜨개질을 즐기던 큰누나 덕분에 나일론 실로 연을 만들 수 있었다. 큰 누나는 뜨개질을 하여 아버지의 큼직한 스웨터와 한쌍의 강아지 인형도 만들었지만, 누나의 작품 중에 압권은 나일론 실로 뜬 장바구니였다. 나일론 실은 70년대에 처음 보급될 당시에 상당히 귀했다. 어머니는 누나가 뜬 장바구니를 빛이 바래도록 지니고 다니셨다. 세월에 따라 헤진 그 가방은 내 차지가 되었다. 가방을 한 올씩 풀어헤치자 어마어마한 양의 연줄이 나왔다. 연을 아무리 오래 날려도 영원히 끊어질 것 같지 않았다. 소중하게 구한 연줄의 품격에 어울리는 연을 만들고 싶었다. 어머니를 졸라 장롱 속에 고이 간직해둔 한지를 얻고, 망가진 비닐우산을 용케 구하여 대나무 살도 구했다. 한나절을 공들여서 내 생애 최고의 멋진 연을 완성했다. 천하를 얻은 것 같았다.
나의 연은 믿기지 않을 만큼 위풍당당하게 날아올랐다. 무명실로 띄운 연으로는 도저히 다다를 수가 없는 높이까지 올랐다. 쏟아지는 햇살을 안고 하늘 끝까지 닿았는지 모습조차 가물거렸다. 나의 연은 단연 동네 최고의 연이 되었다. 옆에서 재잘거리던 친구들 소리도 사라지고, 연과 나는 하나가 되어 세상에 더없는 평화로움을 느꼈다.
어머니 손을 잡고 숨을 헐떡이며 힘겹게 올랐던 당산에서 느꼈던 그 만족감에 비할 수 있을까. 나의 연에게 동네의 밤풍경도 보여주고, 최고의 연으로서의 권위를 맘껏 누리게 하고 싶었던 것일까. 오후 내내 하늘에 날아올랐던 연을 지상으로 내리기가 싫어서 화장실 지붕 위에 밤새 매달아 두었다. 나일론 실에 매달린 연은 밤하늘의 우주를 날고 있었다. 나는 잠도 이루지 못하고 연신 들락거리며 지켜보곤 했다.
어느 날 이른 아침, 나의 연이 보이지 않았다. 밤사이 연이 바람에 날아가 버리고, 끊어진 연줄만 힘없이 길게 이웃집 지붕 위로 걸쳐져 있었다. 영원하리라 믿었는데, 그 허망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찔끔 눈물이 났다. 사람은 스스로의 위안을 통하여 성장한다고 하던가. 그 이별의 아픔을 잊기 위하여 나도 심리적 보상을 찾으려고 하였다. ‘내 꿈이 연을 올라타고 미지의 세계로 나아간 것이다. 어머니와 달맞이 기도를 하던 당산까지 올랐는지도 모른다. 거기서 나 대신 나를 위한 기도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 나의 터부들이 사라지고 날아간 내 연이 어머니와의 기도를 대신하게 되었다고는 하나, 어머니가 내 머리를 쓰다듬을 때 머리가 맑아지던 그 느낌과 누군가가 나를 지켜주고 있다는 그 안도감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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