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아란 하늘에 천천히 구름이 걸어갈 때, 대숲에 일렁이던 바람이 땀에 배인 목덜미를 스친다. 때때로 우리는 이런 황홀한 경험을 한다. 마음이 가라앉으며 보다 큰 질서의 존재를 느낀다. 이것은 정화(purification)의 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정화를 거치며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굳혀나가고, 또 인격을 조금씩 위로 밀어 올린다.
정화는 이와 같은 순수한 주관적 체험 외에도 얻을 수 있다. 남의 이야기를 들으며 깊이 공감한다든지, 다른 사람의 책을 읽으며 아프고 슬픈 마음의 공유를 거쳐 기쁨의 외침으로 빠져들 때 가지는 것이다.
얼마 전 유지담 전 대법관의 책 ‘법의 길, 삶의 길’을 손에 넣었다. 처음부터 글이 무척 좋아 시간을 두고 아껴 읽으려는 생각에 천천히 읽어나갔으나, 며칠 후 책 속으로 몰입하며 한꺼번에 모두 읽어버렸다. 자서전이라는 형식이 갖다 주는 선입견-성공한 사람이 자신의 과거를 적당히 윤색하여 펴낸다는-은 이 책에서는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 그의 화려한 전력이 입히는 채색은 오히려 책의 가치를 가린다.
그의 본질은, 충청도 깡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아이였다. 그리고 그는 이 점을 내내 잊지 않는다. 이 아이가 부모의 지극한 정성과 사랑으로 키워지며, 온갖 인간적 시련을 겪은 뒤 하나의 커다란 나무로 성장하는 이야기가 줄거리를 이루는 책이다.
일반학교의 학비를 대기 어려워 들어간 체신고등학교에서, 그는 지급되는 장학금을 쪼개고, 아르바이트와 틈을 내어 한 장사로 번 돈을 합해 부모님께 보내드려야 했다. 고달픈 인생항로에서 네번에 걸쳐 완전히 죽을 고비를 천행으로 넘기면서도, 언제나 천명을 가슴에 새긴 겸손한 사람이다. 판사로 있으며 얄팍한 법률지식에 도취되어 교만으로 가득 찬 인간이었지 않았을까 하는 격렬한 반성을 할 줄 아는 고도의 지성을 가진 교양인이기도 하다.
책을 읽으며 콧날이 시큰거리고, 눈동자가 흐려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책을 통해 그와 나는 감정의 이입을 통해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법조인이 구사한, 일견 무뚝뚝하고 투박하지만 특유의 청량한 문맥이 일으키는 바람은 내 몸과 마음을 정화시켜 주었다.
한 가지 아쉬운 생각이 맴돌았다. 어찌해서 이 ‘놀라운 책’을 나를 비롯한 한정된 독자밖에는 읽을 수 없는가? 더 많은 사람들이 읽으며 정화의 체험을 할 수 있을 텐데. 그리고 법조인이 되고 싶은 사람, 그리고 그 길을 걷고 있는 젊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얼마나 장래에 큰 도움을 받을 것인가? 좀 더 나아가서, 그의 평생을 나타내는 물건들과 함께 그 일생을 일목요연하게 홀로그램과 같은 첨단기법을 통해 영상화하는 시설을 하나의 기념관에 모아둔다면, 보다 많은 사람에게 긍정적 영향을 장기적으로 끼쳐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미친다.
이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과거 경주에 동리목월문학관을 만들기 위한 사업에서 상임이사역을 맡아 실제 참여해본 경험을 토대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정부당국자의 적절한 배려와 가족의 어느 정도 헌신이 있으면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
그 책에 쓰인 문장의 감동력은 위대한 문학작품에 뒤질 바 없다고 본다. 한국에는 지금 많은 문필가의 문학관이 서있지 않은가. 법학자의 경우에도 각 대학에서 적지 않은 기념강의동이 들어서 있다. 훌륭한 법조인도 이 대열에 서게 할 필요가 있다. 기념관이라는 울대를 통해 그의 진솔하고 사회공헌적 일생이 사람들에게 긴 울림을 가지며 뻗어나간다.
잘 알다시피 현재 우리는 대법원이 세운 가인 김병로 선생의 기념관 단 하나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분 외에도 당장 우리 머리에 떠오르는, 시대의 사표가 되는 법조인들이 적지 않다. 개인의 기념관을 세우기가 너무 거창하면 몇 분을 하나의 카테고리에 넣어 함께 기리는 기념관을 세울 수도 있다.
법조인이 뭇매를 맞는 요즘 뜬금없이 웬 소리냐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이처럼 매운 세태가 공연히 생겨난 것은 아니다. 법조계 스스로도 이런 꼭 해야 할 일을 해오지 않은 것이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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