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문인구 변호사를 추모하며

쉬지 않고 무엇인가 하여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고 자인하는 고인은 우리 나이로 구순이셨지만 타계하시기 전날까지도 점심은 김찬영 변호사님 등 친구들과 함께 드시고 사무실에 돌아와 오는 3·1절에 거행되는 3·1문화상 시상식에 따른 제반 문제를 검토하셨다. 퇴근하시기 전에는 필자에게 전화로 3·1정신 선양에 관한 몇 가지 의논을 하고 다음날 만나기로 약속까지 하셨다. 평소처럼 저녁을 드시고 사모님과 함께 설날 세뱃돈 이야기를 하며 환담하시다가 늘 취침 전에 하는 대로 반야심경의 한 대목을 암송하시고는 잠자리에 드셨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참으로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셨다.
검사 재직 시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기초하고 건의한 일로 뜻하지 않게 24파동을 겪었고, 3·15부정선거와 4·19, 5·16과 유신체제, 그리고 12·12와 5·18 등 역사의 격랑을 헤쳐 온 고인은 1987년 대한변호사협회 협회장으로 전두환 정권의 4·13 호헌조치에 대하여 시민사회단체 가운데 선두로 반박성명을 발표함으로써 6월민주항쟁의 물꼬를 튼 주인공이다. 4·13 당일은 월요일로, 월요일마다 변협 상임이사회가 열렸는데 이때 고인은 4·13조치를 예상하고 성명서 초안을 미리 준비해 오셔서 당시 인권이사인 유현석 변호사와 공보이사인 필자에게 성명내용을 검토케 하셨다. 당국에서는 신문사의 윤전기를 세워놓고 성명을 취소하라고 위협하였지만, 끝내 거부하시고 필자와 함께 피신하였다. 서슬이 시퍼런 군부정권 아래서 실로 목숨을 건 용기였다. 이는 하나의 예이지만, 고인은 언제나 변호사가 변호사다운 활동을 하려면 변호사단체가 활발하게 움직여야 한다는 신념에서 서울통합변호사회장, 한일변호사협의회장, 대한변협 협회장을 거쳐 한국법학원장을 역임하시면서 인간의 얼굴을 한 자유민주주의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몸소 보여주셨다.
작년에 출판된 고인의 저서 ‘역사의 격랑에 오늘을 묻다’의 부제 ‘인간, 상식, 법으로 정의를 찾아 헤맨 문인구 회고록’에 담긴 것처럼 고인이 평생 지켜온 화두는 ‘인간’ ‘상식’ ‘법’ 그리고 ‘정의’였다. 고인은 정의란 말로서의 주장이 아니라 사회봉사와 배려, 그리고 건전한 상식으로 조금씩 행동되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인권도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적인 대우와 호소할 곳이 없이 오지에서 울고 있는 인간을 존중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신다. 뿐더러 고인은 정의를 추구하는 열정, 집념과 함께 언제나 유머, 위트와 인간애, 상식과 교양을 중시하는 건전한 도덕성과 인간미가 남달라 인간적인 매력이 넘쳐났다.
1988년 대한변협 협회장으로서 처음으로 일본변호사협회의 초청을 받아 축사를 하면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선의와 구김 없는 인간적인 노력은 쌓이고 쌓인 역사의 매듭을 풀어주고 인간의 원념(怨念)을 녹여주는 위대한 힘을 갖고 있다”고 말하여 기립박수를 받기도 하였다.
1990년에 펴낸 2년간의 변협 협회장 활동을 담은 기록 ‘대결과 희망의 시대’는 지금도 변협이 나아갈 방향과 지침이 되고 있다.
고인은 학문적인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아 법학박사 학위에다가 각 대학에 출강하고, 한국경제법학회를 창립하였으며, 1985년에는 명저 ‘한국법의 실상과 허상’을 저술하여 법조계 뿐만 아니라 학계에 큰 반향을 몰고 왔다. 말년에는 그 책에서 바라고자 했던 사법개혁과제들이 하나씩 성사되는 것을 보면서 매우 흐뭇해 하셨다.
현대그룹의 법률고문으로서 30여년간 정주영회장의 오른편에 서서 형제애 같은 친분으로 아산복지사업재단의 창립, 의료취약지역에의 병원 건설, 서울아산병원 건립 등 복지사업의 기초를 다졌을 뿐만 아니라 지적장애아를 돕는 ‘한국키비탄운동’, 인류사회의 재건이라는 웅대한 비전을 바탕으로 창립한 ‘밝은사회운동’, 일찍이 해외교포문제에 눈을 떠 1965년에 출범한 해외교포문제연구소 등의 일에도 열정을 불태우셨다.
최근에 이르러 가장 역점을 두고 진력하시던 일은 1994년부터 지금까지 20년간 일해 온 3·1문화재단 이사장이다. 제54회 3·1문화상 시상식을 앞두고 수상자 선정을 마치셨고, 특별상 수상자인 ‘재독한인총연합회’에 깊은 관심을 두시고 수상자들을 기다리고 계셨다. 그것은 올해가 한독수교 130주년에다가 광부, 간호사의 파독 50주년이어서 더욱 뜻깊은 행사이기 때문이었다. 다른 해 같으면 마감 날까지 수정을 거듭하시던 기념사를 일찍이 마련해 두셨으니 아마도 떠나심을 미리 짐작한 것일까? 작년 말경 고인의 발의로 3·1문화재단이 심혈을 기울여 발간한 ‘3·1운동 새로 읽기’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홍보방안에 대하여 노심초사하셨다. 3·1정신이야말로 우리의 헌법정신이자 세계정신이요 인류정신이라고 자랑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훌륭한 내용임에도 후손들이, 특히 이 땅의 젊은이들이 소홀히 여기는 것 같아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셨다.
얼마 전 폭설이 내린 날 고인은 현충일이면 으레 찾으시던 현충원을 일부러 찾으셨는데 아마도 순국영혼들과 함께하고픈 마음이셨으리라. 고인이시여! 당신이 그토록 사랑한 대한민국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이 땅에 임하시어 가르침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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