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통 암흑에 덮인 흰 손이 심장 모양의 다이너마이트를 쥐고 있다. 흰 손에 붉은 피가 줄줄 흐른다. 일본어 수업시간에 전자사전으로 몰래 듣고 있는 노래의 앨범 커버 아트다. 흰 손의 주인공은 다이너마이트를 던지지 못한 채 결국 제 피를 본 걸까, 아니면 다이너마이트를 던질 그 순간을 위해 몇 방울의 피를 기꺼이 희생하는 걸까?
전자사전 아래에는 눅눅한 학생인권조례 책자가 깔렸다. 오늘 아침자습시간에 담임선생님께서 세권 정도 나눠주시면서 모두 한 번씩 읽어보고 뒷장 공백에 이름을 쓰라고 하신 것이었다. 대부분 친구는 대충 끄적거린 다음 다른 친구에게 넘기곤 했다. 마치 빨리 넘기지 못하면 자신의 손에서 터지는, 다이너마이트를 다루듯 말이다.
그래도 읽으면서 고민하는 흔적이 넘치는 페이지가 이따금 섞여 있다. 가장 많이 더럽혀진 ‘두발, 복장 자유화 등 개성을 실현할 권리’가 쓰인 제12조에는 ‘파마 염색 자율화 제발 좀!’ 라는 낙서 주위에는 공감과 동의만큼 수많은 숫자가 어지럽혀있다. 제28조에는 ‘동성애는 왜 언급 없어, 동성애 무시하니’란 낙서가 인상 깊다. 그리고 제6조에 적혀있는 또 다른 인상 강한 낙서, ‘일본어 선생님 체벌은 나빠요.’
나는 이어폰을 던졌다. 서술형답안지가 팔락 넘어가더니 딱, 딱, 탁, 탁. 네 번의 매질이 쏟아졌다. 교탁 앞의 아이가 네 문제를 틀렸나 보다. 중학교를 졸업할 즈음 금지되었던 학교체벌을, 고등학교에서 다시 만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처음엔 우리도 몰래 체벌 영상을 찍고, ‘교육청에 신고할까’라는 말도 많이 했었다. 거의 실행에 옮길 뻔했던 우리를 막아선 사람은 다름 아닌 선배님들이셨다. 우리가 입학하기 전 어떤 선배께서 휴대전화로 선생님의 체벌장면을 몰래 찍어 인터넷에 올린 적이 있는데, 학교에서 바로 게시자를 수색해내어 징계를 내렸고 동영상을 촬영한 휴대전화마저 압수해서 한 달간 그 선배의 손에는 휴대전화가 아닌 수전증이 들려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옥색의 책자를 뒤적였다. 친구들의 낙서가 굼벵이처럼 꿈틀거린다. 살아있는 우리가 원하는 살아있는 바람이다. 학생으로서, 사람으로서 주어져야 하는 권리. 우리에겐 다이너마이트를 던질 권리가 있는데 왜 그것이 ‘잘못’으로 치부되는 걸까?
왜 다들 던져야만 하는 다이너마이트를 던지지 않는 걸까? 던져봤자 변할 것 하나 없는, 자살행위라고 생각한 것일까? 제대로 던져보기는 하고 그런 생각을 하는 걸까?
“11번.”
여기까지 생각하는 참에 선생님께서는 나 아닌 ‘11번’을 부르셨다. 11번인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 끄는 소리가 여느 때보다 크게 들려온다. 그렇지만 내 신발은 서술형 답안지를 향해 소리 내지 않는다. 대신 내 입술은 소리를 흘린다.
“저기, 선생님. 할 말이 있습니다. 선생님도 학생인권조례를 읽으셨으리라 생각하는데요, 읽다 보니 선생님께서 잊고 계신 부분이 있는 거 같아서요.”
나는 옥색의 학생인권조례 책자를, 옥색 다이너마이트를 흔들었다. 그리곤 낙서가 많고 꾸깃거려서 찾기 쉬운 그 부분을 찾아 읽어나갔다.
“제6조 3항. 교육감, 학교의 장 및 교직원은 체벌, 따돌림, 집단괴롭힘, 성폭력 등 모든 물리적 및 언어적 폭력을 방지하여야 한다.”
친구들이 조심스레 환호성을 깨뜨리자 선생님은 내리지 않은 용변이라도 보신 듯한 얼굴이셨다.
“제26조. 권리를 지킬 권리. 학생은 인권을 옹호하고 자기나 다른 사람의 인권을 지키기 위한 활동에 참여할 권리를 가지며, 그 행사로 인하여 불이익을 받지 아니한다…”
누군가 심장과도 같은 다이너마이트의 핀을 주인 몰래 뽑았다면, 그 주인은 손에 다이너마이트를 꼭 쥔 채로 자신이 터져버리는 것을 그대로 감상할 수도 있고 다이너마이트를 던져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본래 그것을 던질 수 있고 던져야만 한다면, 던지는 동안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힌다 하더라도 던져야 하는 게 아닐까. 나는 인권이 그런 다이너마이트라는 생각을 했다. 살아있는 우리를 살아있게 만드는, 그런 옥색 다이너마이트 말이다.

/김선정 서울 국제고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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