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눈이 많던 올 겨울도 막바지로 치닫고, 며칠 있으면 설이다. 명절이 다가오면서 부쩍 고향 생각이 나고, 내게 늘 마음의 안식처이시던 부모님 생각도 많이 난다. ‘부자가 되는 방법은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모아야 하는 것이다’라던 아버지는 검소한 생활이 몸에 밴 분이었다. 시골 농군의 집안이 대개 그러하듯이 의식주 모두 아버지의 허락이 떨어져야만 살 수 있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누나들이 옷 한 벌 살 때면 며칠씩 아버지를 졸라야 하는 건 당연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엿한 숙녀가 된 후에도 큰누나는 늘 옷이 부족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의 기억이다. 설을 며칠 앞두고, 볕이 좋다며 문풍지를 새로 바르고 있는 아버지께 누나는 새 옷 한벌만 사달라고 조르고 있었다. 늘 부지런하고 어여쁜 누나가 울음보까지 터트리는 모습을 마냥 지켜만 보기에는 마음이 아팠다. 나는 아버지 곁으로 슬금슬금 다가가서 말씀드렸다. “아버지, 문풍지는 낡아 헤지진 않았지만, 명절이면 새로 바르잖아요. 옷도 꼭 낡아야만 새로 사야하는 건 아니잖아요.” 아버지는 내 얼굴을 힐끗 돌아보시더니 너털웃음을 지으셨다. 아무튼 어린놈의 그럴싸한 참견이 대견하셨던지, 그해에 우리 6남매는 설빔을 얻었다.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마음가짐을 위하여 이런저런 핑계로 미뤄왔던 이발을 하였다. 세월이 변했다고는 하나, 설을 코앞에 둔 이맘때의 목욕탕은 여전히 붐빈다. 대견스런 눈빛으로 해마다 커지는 아들의 등짝을 밀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정겹다. 사실 아들놈과 목욕탕을 가본 기억이 가뭇하다.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이 못내 부끄러운지 매번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피하기만 하니 부럽기 그지없는 풍경이다. 아버지를 따라 새벽 장에 가던 기억조차 아름답게 기억되는 나로서는 아들놈과 무엇이든 같이 해보고 싶지만, 철저한 짝사랑일 뿐이다. 다행히 올해 고등학교 3학년이 되는 아들놈과 근사한 하루 나들이를 계획하고 있다. 이번에는 마음이 앞선 충고는 절대하지 않으리라. 마음으로 느끼고 가슴으로 아들을 안아주리라고 다짐을 해본다.
어릴 적 설날은 그 단어만으로도 두근거렸다. 동이 채 트기도 전, 어슴푸레한 새벽 세배 길에 나서노라면, 두툼해질 주머니를 상상하면서 최고의 설렘을 누렸다. 요즘은 평소에도 원하는 것을 쉽게 구하는 시대인지라 애들 설빔을 따로 마련하는 것도 아니고, 문풍지를 바를 일도 없으니 설이라고 감회가 새롭거나 설렐 일도 별반 없는 노릇이다. 다만, 정성이 담긴 세뱃돈을 주려고 해마다 예쁜 봉투를 구하여, 아들과 조카의 이름을 적고 빳빳한 새 돈을 넣으면서 올 한해도 잘 자라주기를 소원해보고, 내 마음도 다져보는 나름의 새해 의식은 고수하고 있다.
매년 새해엔 크고 작은 결심을 한다. 담배 끊고 술도 줄이고 운동을 열심히 하리라 다짐해보지만 매번 작심삼일이 되기 일쑤였다. 바쁘니까, 피곤하니까,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으니까 등 나름의 합리화를 해가며 지내온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나이가 들어가는 탓인지, 연말연시의 잦은 술자리 탓인지 최근에 늘 피곤하고 몸이 무거웠다. 혹시 큰 병이나 난 것은 아닌지 덜컥 겁도 났다. 오랫동안 미루어 온 건강검진을 받기로 했다. 아침 일찍 병원에 도착하여 공복 상태에서 채혈부터 했다. 혹시 당뇨병이라도 있다고 하면 어쩌나 염려도 되고,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 복부초음파, CT 등 순서대로 진행되었다. 연유도 없이 기다리게 하는 병원 체제에 화도 나고, 이런 검진에 하루를 허비해야 하는 내 자신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온갖 성가신 과정을 거치면서 몸이 더 지친다. 새해를 맞아 하는 이발이나 목욕처럼 그리도 미뤄왔던 건강검진도 했으니 개운하게 설빔은 한 셈이다. 이제 중년의 한가운데를 걷고 있는 만큼 건강도 잘 살피고 그동안 소원했던 아들놈과도 더 가까워져야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해 바뀜은 사람들이 정한 인위적 마디이고 굽이일 뿐이다. 거기에 딱히 의미를 두는 것은 허망하고 어리석기도 하다. 그러나 산다는 것이 마디를 만들어가며 매듭을 지어야 새로울 수가 있는 법이니, 올해도 부질없을지 모를 일이지만 나름 새해 다짐과 소원을 빌어본다. 자식 놈들 무탈하게 잘 자라주기를. 그리고 짜증이나 화내지 말고 늘 웃는 내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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