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2012. 1. 27. 선고 2009다93817

1. 사실관계의 요약과 쟁점
중국은행 산동지점이 개설은행의 지위에서 2007년 7월 20일 미라교역을 수익자로 하여 개설한 1차 취소불능 화환신용장은 개설 통지가 유효하게 이루어졌고, 같은 날 매입은행인 한국외환은행이 위 신용장에 근거해서 선적서류를 유효하게 매입하였다.
피고(개설은행)의 산동지점이 2007년 8월 17일 미라교역을 수익자로 하여 개설한 2차 신용장의 경우, 이 신용장에 적용되는 제6차 개정 신용장통일규칙 제2조는 선적서류의 매입에 있어서 대금의 지급은 현금, 수표, 은행을 통한 이체, 계좌입금 등의 방법으로 현실적인 대가를 즉시 지급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규정하고 있고, 원고(매입은행)가 2007년 8월 20일경 미라교역의 매입 요청에 따라 2차 신용장에 근거해서 서류를 매입하고 2007년 8월 27일 미라교역의 별단예금 계좌에 미화 81만9293.15달러를 입금하였다.
그런데, 매입은행이 수익자의 서류 매입 요청에 따라 매입대금을 수익자의 별단예금 계좌에 입금하면서, 매입대금을 위 계좌에 입금해 두었다가 신용장대금이 매입은행에 지급되면 기존에 지급거절된 신용장대금을 위 계좌에서 상계하고 잔액을 수익자가 인출하여 사용하기로 매입은행과 수익자가 합의하였다.
그러나, 개설은행은 이들 신용장에 근거한 매입은행의 서류 매입과 이에 따른 서류의 제시와 신용장대금의 지급청구에도 불구하고, 매입은행이 당해 신용장 원본의 제시없이 매입 요청에 응한 것은 정당한 매입으로 볼 수 없고, 또한 매입대금을 수익자에게 현실적으로 지급치 아니하였으므로 이는 매입이라고 볼 수 없으며, 한편 매입은행이 수익자의 서류 위조에 공모하였거나 이를 알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류를 매입하였다는 이유 등을 들어 신용장대금의 지급을 거절하였다.

2. 쟁점과 판결요지
제6차 개정 신용장통일규칙(UCP 600) 제2조는 “신용장(Credit)은 그 명칭과 상관없이 개설은행이 일치하는 제시에 대하여 결제(honour)하겠다는 확약으로서 취소가 불가능한 모든 약정을 의미한다”고 규정함으로써 신용장을 위와 같은 약정이 기재된 문서가 아닌 그러한 약정 자체로 정의하고 있고, 제9조 제a항은 “신용장 및 이에 대한 조건변경은 통지은행을 통하여 수익자에게 통지될 수 있다. 확인은행이 아닌 통지은행은 결제(honour)나 매입에 대한 어떤 의무의 부담 없이 신용장 및 이에 대한 조건변경을 통지한다”고 하고 있으며, 제2조는 “매입(Negotiation)은 일치하는 제시에 대하여 지정은행이, 지정은행에 상환하여야 하는 은행영업일 또는 그 전에 대금을 지급함으로써 또는 대금지급에 동의함으로써 환어음(지정은행이 아닌 은행 앞으로 발행된) 및/또는 서류를 매수(purchase)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규정한 다음, “제시(Presentation)는 신용장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개설은행 또는 지정은행에 대한 서류의 인도 또는 그렇게 인도된 그 서류 자체를 의미한다”고 규정하여, 신용장 개설통지나 매입에 있어서 신용장 원본의 제시나 교부를 명시적으로 요구하지 않을 뿐 아니라, 매입의 대상도 ‘환어음 및/또는 서류’로만 특정하고 있다.
이러한 규정 내용에 비추어 보면, 통지은행의 신용장 개설통지란 통지은행이 수익자에게 개설은행의 신용장 개설 사실과 그 내용을 알리는 것에 불과할 뿐 반드시 신용장의 원본 제시나 교부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며, 또한 매입은 단지 지정은행이 ‘환어음 및/또는 서류’ 자체를 매수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매입에 있어서도 신용장 원본의 제시나 교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통지은행이 수익자에게 신용장 개설통지를 할 때 신용장 원본을 교부하지 않거나 혹은 매입은행이 수익자로부터 신용장 관련 서류를 매입할 때 신용장 원본을 제시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러한 신용장 개설통지나 매입도 여전히 적법·유효하다고 할 것이다.
‘매입(Negotiation)’에 관한 제6차 개정 신용장통일규칙(UCP 600) 제2조의 규정 내용에 비추어 보면, 서류의 매입은 매입을 수권받은 지정은행이 현금, 구좌입금 등의 방법으로 수익자에게 현실적인 대가를 즉시 지급하거나 대금지급 채무를 부담하는 방법 등에 의하여 이루어질 수 있고, 여기서 후자의 방법에 의한 매입은 매입은행이 특정 일자에 수익자에게 대가를 확정적으로 지급하기로 하는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채무를 부담함으로써 현실적인 대가의 즉시 지급에 갈음할 수 있는 경우를 의미한다고 할 것이다(대법원 2002. 10. 11. 선고 2000다60296 판결 참조).
원고가 2007년 8월 20일경 미라교역의 매입 요청에 따라 2차 서류를 매입하고 2007년 8월 27일 미라교역과의 합의에 따라 미라교역의 별단예금 계좌에 미화 81만9293.15달러를 입금한 이상, 원고는 2차 서류의 매입에 관해 현실적인 대가를 즉시 지급하였다. 원고가 2차 서류를 매입하되 그 매입대금을 미라교역의 별단예금 계좌에 입금해 두었다가 2차 신용장의 대금이 원고에게 지급되면 기존에 지급거절된 신용장의 매입대금 중 지체기간이 오래된 2건을 위 계좌에서 상계하여 상환받고 그 잔액을 미라교역이 인출하여 사용하기로 하는 내용의 원고와 미라교역 사이의 합의는, 미라교역이 원고에게 다른 신용장의 매입대금을 상환할 채무를 부담하고 있는 상황에서 별단예금 계좌에 입금된 금원을 상계의 대상으로 하기 위한 것으로 이로 인하여 원고가 현실적 대가를 즉시 지급한 효력이 부정된다고 할 수는 없다.
화환신용장에 의한 거래는 본질적으로 서류에 의한 거래이지 상품에 의한 거래가 아니므로, 은행은 상당한 주의를 기울여 그 선적서류가 문면상 신용장의 조건과 일치하는지 여부만 확인하면 되고 그 선적서류에 대한 실질적인 심사의무까지 부담하지는 않으나, 그 선적서류가 위조(변조 또는 허위 작성을 포함한다)되었을 경우 은행이 위조에 가담한 당사자이거나 서류의 위조 사실을 사전에 알았거나 또는 그와 같이 의심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경우에는, 이는 신용장거래를 빙자한 사기거래에 지나지 아니하므로 그 은행은 더 이상 이른바 신용장의 독립·추상성의 원칙에 의한 보호를 받을 수 없다(대법원 2002. 10. 11. 선고 2000다60296 판결 참조).

3. 판례평석
매입의 의의와 법적 성질 : 1993년 제5차 개정 신용장통일규칙은 어음이나 서류의 매입에 관하여 규정하고 있는 제9조를 비롯하여 일관되게 매입을 ‘negotiate’라고 표현하고 있으나, 1983년 제4차 개정 이전의 제3조는 매입을 특히 ‘to purchase/ negotiate’라고 표현하고 있었으므로 이를 우리나라의 학설이나 실무관행에서는 대부분 매입으로 번역하여 사용하여 왔다.
여기서 ‘negotiate’라는 용어는 법률적으로는 통상 어음 등을 배서나 교부의 방법으로 타인에게 양도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신용장거래에 적용하여 말한다면 수익자가 만기 미도래의 환어음 또는 선적서류를 상대방인 은행에게 배서나 교부의 방법으로 양도하고 어음금액에서 만기일까지의 이자와 타 비용을 공제한 금액은 은행으로부터 취득하는 것인바, 이는 실질에 있어 환어음의 할인에 해당하여 일부에서는 할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실질에 있어서는 할인인데 매입이라는 표현을 주로 사용하고 있는 셈인데 매입이라는 용어의 사용이 실무에서나 학설에서 굳어졌다.
어음이나 서류의 매입의 법률적 성질에 관하여서는 어음의 매매, 즉 어음의 소지인이 지급인으로부터 어음금액을 지급받을 수 있는 권한·지위를 표창하는 어음의 매매라고 하는 어음매매설과 어음의 매입에 의하여 매입액 상당의 금전소비대차가 매입은행과 수익자 간에 성립되고 그 소비대차 상의 채무의 지급방법으로서 어음이 은행에 교부된다고 하는 소비대차설이 크게 대립되고 있다. 전설의 입장에서는 매입은행은 개설은행이 지급 등을 거절한 경우 어음의 발행인인 수익자에 대하여 소구권을 가질 뿐이다. 후설의 입장에서는 매입은행은 수익자에 대하여 원인채권인 소비대차 상의 채권과 어음 상의 소구권은 병존하여 가지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통설은 어음의 매매설로 기울어져 있으며 대법원 판례도 이 설에 입각하고 있다(대법원 1984. 11. 5. 선고 84다카1227 판결 법원공보 243호 28면, 대법원 1985. 2. 13. 선고 84다카1832 판결 법원공보 749호 421면. 그러나 위 판례들은 약속어음의 할인에 관련한 것이고 직접적으로 화환어음의 할인에 관한 것이 아님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독립·추상성의 원칙의 예외(Fraud Rule) : 신용장거래는 원칙적으로 서류에 의한 거래이며, 그 기본이 되는 매매계약과는 별개의 독립된 거래이므로 은행은 그러한 매매계약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또한 그러한 계약에 의하여 조금도 구속되지 아니한다는 신용장거래의 독립·추상성 원칙은 국제무역거래에서 오랫동안 확립된 관행으로서 신용장통일규칙에 의하여 명문으로 수용된 기본원칙이라 할 수 있다(UCP 제3~4조 참조).
그러나 이러한 독립·추상성 원칙을 악용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서류 등을 위조·변조하여 신용장조건에 부합되는 서류 자체만을 구비하고 이를 은행에 제시하여 은행을 기망함으로서 신용장대금을 편취하는 사례가 가끔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악덕 수출상의 사기행위(fraud)에 대하여 서류만을 취급하는 은행으로서는 쉽사리 이를 발견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서류의 위조 여부나 서류에 표시된 상품의 실질적인 상태 여하에 대하여 은행은 책임이 없기 때문에 은행은 신용장조건에 일치되는 서류가 제시되면 그에 대하여 대금을 지급할 수밖에 없으며, 또한 수입상인 개설의뢰인은 개설은행에 대하여 그 대금을 지급 또는 보상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도착한 상품이 실제로 계약한 상품과 서로 다르다든가 또는 상품 그 자체가 선적되지도 아니하였다는 등의 사실을 수입상이 나중에 발견하게 되었을 때에는 수입상으로서는 중재 또는 소송의 방법을 이용하여 다른 나라에 있는 수출상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하여 수입상으로서는 수출상의 위와 같은 사기가 있을 때에는 신용장거래의 독립·추상성에 일정한 예외를 인정하여 신용장에 의한 대금지급을 사전에 금지시킬 수 있어야 할 것이며,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켜 주는 법적 수단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 사건의 경우, 개설은행인 피고는 매입은행이 수익자의 서류 위조에 가담하였거나 이를 사전에 알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입 요청에 응하였다는 이유로 신용장대금의 지급을 거절하였으나 이에 관해 아무런 입증을 못하였다.
통상의 경우 공신력 있는 은행이 매우 정교하게 위조한 서류인 경우에는 서류의 매입 과정에서 서류가 위조되었음을 알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더욱이 위조에 가담하거나 사전에 공모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유중원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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