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 노인요양시설에 계시는 작은할아버지를 잠시 집으로 모시고 왔다. 오랜만에 증손자들 보신다고 상경하신 할머니께서는 돌아가시기 전에 시동생을 한번이라도 만나야겠다고 늘 말씀하셨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다가 이제서야 모시고 와서 두 분을 만나게 해 드렸다.
비록 종조부(從祖父)이시지만 친할아버지가 계시지 않았던 나에게는 작은할아버지가 곧 친할아버지였고, 어릴 적 고향에서 함께 살았기 때문에 추억도 많은 분이다.
어릴 적 마을 사람들은 나를 국장집 종손녀(從孫女)라고 불렀다. 시골에서 국장집은 우체국장을 말했다. 조그만 면소재지에서 우체국은 나름 빵빵한 관공서였다. 그 시절 시골초등학교 운동회는 중요한 마을 행사였는데, 그때마다 운동장 연단 옆에는 흰 천막이 쳐졌고 무슨 삼부요인이나 되는 것처럼 시골면장, 농협조합장, 그리고 우체국장이 귀빈석에 나란히 앉았다. 어린 나는 할아버지가 자랑스럽기도 했고 약간은 우쭐한 마음이 생기기도 했다.
작은할아버지는 소풍가는 날마다 나를 부르셔서 늘 용돈을 주셨다. 6학년 수학여행가던 날 주신 5000원이 마지막이었고, 그해 할아버지는 정년퇴직하셨다. 정년퇴직 후에도 평생 연금이 나온다며 늙어서 아무 걱정 없다고 자랑하시곤 했다.
그런데 불과 두어 해 지나지 않아 아들의 사업이 실패해 과수원 딸린 집까지 경매에 넘어가고 작은할머니까지 일찍 세상을 떠나셨다. 그 후 고향을 떠나 도시에 사시다가 지금은 노인요양시설에서 삶의 마지막을 보내시고 계신 것이다.
그런데, 너무 늦게 찾아뵈었던 걸까. 노인성 치매를 앓는 작은할아버지는 형수인 할머니도, 종손녀인 나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큰조카인 우리 아버지의 이름만 기억하실 뿐이었다.
할아버지는 나에게 자신을 소개하셨다. ‘우체국에서 오래 공직에 있었고 우체국장으로 퇴직했다’고. 내 아버지 이름을 이야기했더니 슬픈 표정을 지으신다. ‘내가 형이 하나 있는데 일찍 돌아가셨고 다행히 어린 아들을 하나 남겼다고. 우리 집안의 종손이고 내 장조카인데…가슴이 아프다’고.
나의 친할아버지는 한국전쟁 당시 돌아가셨다. 친할아버지는 굳이 피난을 가지 않으시겠다는 증조부를 혼자 두지 못해 네 살배기 아들을 동생 내외에게 맡겨 피란을 시키고 그냥 마을에 남으셨다고 한다. 그때 마을에는 부역령이 내려졌고 부역을 갔던 친할아버지는 부상을 당해 손수레에 실려 집에 오셨고 깨어나지 못하고 사경을 헤매다가 사흘만에 돌아가셨다.
작은할아버지의 기억은 집안이 몰락의 길을 걷기 전에서 멈춰 있었고, 젊은 시절 겪은 일들의 기억이 선명했다. 특히 부모를 보살피기 위해 함께 피란을 떠나지 못하고 불행히도 변고를 당한 형님에 대한 미안함, 일찍 아버지를 여윈 어린 조카에 대한 연민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어린 시절 나에게 보여주신 따뜻한 사랑도 다 거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나는 할아버지의 기억을 살리기 위해서 할아버지가 또렷이 기억하는 내 아버지를 기준으로 해서 “제가 할아버지 조카의 딸이에요, 선아”라고 몇 번을 외쳤지만, 할아버지는 “선아? 아니, 선아 엄마겠지” 하신다. 그렇다, 나는 그 어린 조카의 딸일 수는 없는 나이다. 내 나이도 벌써 마흔이니까.
올림픽대로를 따라 모셔다 드리는 길에 차창 밖을 내다보시면서 여기가 어딘지 물으신다. 한강이라고 했더니 “한강? 그럼 여기가 서울인데…” 그러신다. 아직도 고향에서 우체국을 다니시면서 온 집안을 돌보시는 모습으로 살고 계신 할아버지. 지금 그 모습 그대로 편히 사시다가 행복하게 돌아가시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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