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변협신문과 잡지 편집인을 2년간 했다. 마지막 인사를 하고 개인법률사무소로 돌아갈 때가 됐다. 변협 일은 자원봉사다. 월급도 없다. 변협 직원에게는 책상이 있어도 편집인인 나는 이방인 같은 느낌이 들 때가 많았다.
일반적인 협회지나 협회 잡지는 대충 비슷한 운명이다. 직원 한명 정도가 회장의 인사말이나 대필해주고 무성의하게 만들어냈다. 변협신문이나 잡지도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전임자도 그 전임자도 속칭 ‘찌라시’라고 자조적으로 표현했다. 그나마 협회장의 비위에 거슬리는 인터뷰를 실었다가 편집권마저 빼앗긴 임원도 있었다. 모두 잘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이 그렇지 못했다. 기자가 없었다. 전담직원 단 한명이 16면을 직접 써서 채우기는 불가능했다. 보조하는 직원들은 인쇄·배포에도 벅찼다. 자연히 내용이 부실해 질 수밖에 없었다. 나 자신도 변협신문이 오면 비닐봉지를 뜯지 않은 채 그대로 쓰레기통에 쳐넣은 경우가 많았다. 빈곤의 악순환이다. 무성의한 변협신문에 돈을 들이자는 의견이 없었다. 있는 현상에서 그대로 일하기로 했다.
편집인 겸 한명뿐인 대표기자 노릇을 했다. 기사와 컬럼을 쓰고 직접 인터뷰를 하러 다녔다. 근본방향을 고민했다. 첫째는 ‘회원 간의 소통’이었다. 30년 가까이 변호사를 하지만 이웃변호사를 모른다. 서로의 아픔을 공유하는게 소통이다. 글 한편이라도 감동적인 게 있으면 쓰레기통행은 면할 것 같았다. 직원이 사정사정해서 변호사들의 생활단상을 구했다. 자신을 솔직히 드러내려는 변호사가 많지 않았다. 몇몇 변호사가 글을 써 줬다. 그게 몇 번 계속되면 왜 그들 글만 싣느냐고 시샘하는 항의가 왔다.
소설가 윤모 변호사의 소설을 연재했다. 작품성이 있는 글이었다. 아무도 읽지 않는 소설나부랭이를 왜 내느냐고 중단하라는 압력이 왔다. 이게 문예지냐는 강한 빈축도 있었다. 몇 회 남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이 연재를 중단했다.
전담 직원 한명이 1면을 썼다. 변호사 전체의 얼굴인 신문 1면을 어떻게 일개 변협 직원이 쓸 수 있느냐는 항의가 있었다. 엘리트 변호사들의 내면에는 강한 질투가 깔려 있었다. 남 잘난체 하는 꼴을 못 본다. 그 많은 변호사들이 “어떻게 좀 해 봐”라는 하는데 직접 물에 뛰어들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일을 맡은 기간 동안 신문이나 잡지가 나와야 했다. 비 오는 날 이문열씨의 집을 찾아가 무례를 범하기도 하고 인터뷰를 싫어하는 김민기와 언성을 높이며 싸우기도 했다. 쓰레기를 만들고 싶지 않은 개결한 자존심이었다. 목숨 걸고(?) 만든 글을 변협잡지 ‘더 웨이’에 실었다. 산 속에서 암으로 투병하는 변호사의 아픈 사연도 소개했다. 그런데 대법관을 지내신 원로 법조인은 직접 이메일을 보내 그런 오락성 잡지를 왜 만들어내느냐고 했다. 울분이 치솟았다. 당신은 암으로 죽어가는 동료변호사의 절실한 사연들이 오락으로 보이느냐고 되묻고 싶었다.
잡지가 중단됐다. 오기가 생겼다. 변협신문은 회원들의 알 권리를 위한 것이다. 변협신문을 사회를 향한 변호사들의 바른 말을 하는 입이 되게 하고 싶었다. 검사실에서 성추행 당한 여자의 담당변호사를 인터뷰해서 그 실체를 터뜨렸다. 언론이 덮은 걸 변협신문이 특종으로 세상에 알렸다. 변협을 깔아뭉개는 조선일보에 정면으로 대항했다. 국정원의 변론권 침해를 고발했다. 모두들 알면서 외면하려는 언론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용기만 내면 작지만 강한 신문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내부적으로 변호사회의 문제점도 지적했다. 자유로운 변호사들의 모임에 권위주의가 만연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쫓겨날 고비도 많았다.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러면서 어느새 임기 이년이 다 끝났다. 그동안 모난 돌 옆에 있다가 정을 맞은 협회장을 비롯한 관계자들에게 감사한다. 나가면서 한 가지 소망이 남아있다. 변협신문이 ‘찌라시’가 아니라 광야에서 외치는 세례요한의 바른 소리를 내보냈으면 좋겠다.


엄상익 변호사·변협신문 편집인
eomsangik@hanmail.net

저작권자 © 법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