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생존하면서 처음 맞닥뜨린 스트레스는 아마도 추위와 배고픔이었을 것이다. 몇 천년이 지나서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눈앞에서 현실로 변하는 지금도 여전히 추위와 배고픔은 가장 큰 스트레스다.
추워지게 되면 우리 몸은 즉각적으로 항온동물로서의 생존을 위해 갖가지 변화가 일어난다. 일단 땀샘을 막아 열의 누출을 막고 근육에서는 열을 생성해 내기 위한 프로그램이 돌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내외 온도차가 섭씨 20∼30도를 넘게 나기 시작하면 어쩔 수 없이 몸에 손실이 생겨나게 된다. 그 손실 중의 하나가 면역력 약화다.
추위라는 스트레스는 그 어떤 스트레스보다도 강력하게 작용한다. 특히 기초대사량이 적어서 열 생산이 잘 되지 않는 노인들의 경우에는 추위를 느끼는 것에도 둔해져서 쉽게 저체온증으로 빠질 수 있다. 동사가 젊은 사람들에 비해 노인이 많은 이유가 그 때문이다. 고혈압이나 심혈관계 질환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추위는 반갑지 않다. 혈관이 더욱 수축하게 되고 혈전형성이 더욱 용이해지기 때문에 이런 혹한은 더욱 힘들 수밖에 없다
한의학에서도 한사(寒邪)는 매우 중요한 병인으로 취급되었다. 한사는 상한론(傷寒論)이라고 해서 따로 과목이 있을 정도로 의자(醫者)의 관심을 끌어온 주제이다. 한의학은 상한론에 와서야 병에 대해서 증상을 감별하고 차이를 밝혀내고 치료의 방법이 정해지는 학문적 체계를 완성하게 되고 그 이후에 후대의 주석이 덧붙여져서 그 내용이 풍부해졌다.
상한론을 보면 특히 겨울에 추위로 상하기 쉽기는 하나 온전치 못한 4계절의 날씨로 모두 한사에 상할 수 있다는 말에 이어, 상한은 큰 병이 되기 쉬운데 그 증상이 수시로 변하므로 경솔히 다루지 말 것을 당부하는 것으로 첫마디를 연다.
이번 겨울 추위는 어느 때보다도 가혹했다. 그래서인지 올 겨울은 유난히 대상포진 환자들이 많았다. 대상포진은 초기 2∼3일 동안은 심한 동통만을 보이기 때문에 환자들은 흔히 담이 결렸거나 혹은 염좌 혹은 근육통으로 생각하고 치료를 받으러 온다. 병원에서도 이 단계에서는 다른 근골격계 질환의 근육통과 거의 구별할 수 없어 주로 단순 통증치료를 하게 된다.
처음 대상포진 환자를 만났을 때를 생각하면 그때의 당혹감이 잊혀지지 않는다. 옆구리를 삐끗한 것 같다고 해서 치료를 2∼3일 진행했는데 호전의 기미는 없고 통증은 여전해 고민하던 차에 옆구리를 따라서 쭈르륵 물집이 잡혀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아, 대상포진이네요” 했다가 그것도 몰랐냐는 눈빛으로 환자가 돌변하는 바람에 아주 진땀을 뺐었다. 이 질병이 초기에는 이렇게 통증만 있어서 구별하기 어렵다는 변명 아닌 변명을 한참 늘어놓았지만, 뒤늦게 알아본 탓에 떨어진 신뢰를 회복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 이후에 신경절을 따라서 오는 통증에는 반드시 대상포진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의심되는 환자가 올 경우 “대상포진일 수 있으니 2∼3일 지켜봅시다”라고 일단 선수를 쳐놓고 피부에 수포가 생기기 시작하면 “예상했던 대로 대상포진이네요”라고 한다. 한의학에서는 이것을 전요화단(纏腰火丹)이라고 하는데 원인을 초기에는 상한으로 보기 때문에 그에 맞는 치료를 시작한다고 설명을 한다. 이런 능수능란한 멘트를 하기까지는 멘트선정에 실패한 첫 환자의 경험이 기여한 바가 크다.
대상포진의 원인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면역력이 약해진 탓이다. 신경절에 잠복되어있던 바이러스가 면역체계가 약해진 틈을 타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면역계가 정상적인 작동을 하고 있으면 발현되지 못한다. 노인들 혹은 오랜 병으로 지친 사람들이나 스트레스가 심해져서 면역체계가 흔들리는 사람들에게서 주로 나타난다.
통증이나 수포가 생기는 정도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어느 부위에서 발생했는가도 중요하다. 만약에 발생부위가 눈 쪽이나 얼굴 쪽으로 나타나게 되면 실명의 위험도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된다. 수포가 생기기 시작하면 통증은 줄어들게 되지만, 노약자일수록 대상포진 후에 신경통이 한동안 지속되는 경우도 있다. 대부분의 경우는 일회성으로 한번 앓고 지나가게 되는데 반복되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대상포진에 걸렸다면 제일 좋은 처치법은 물을 많이 마시고 푹 쉬는 것이다. 대상포진 후기나 후유증의 치료약은 보약계통이 많은 이유도 무너진 면역체계를 보완하는 데에 이런 약들이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추위라는 스트레스에도 약해지는 면역체계를 보면 항온동물로 살아가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오디한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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