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모 교수가 남성 성기가 묘사된 사진들에 대해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음란물 판정을 내리자,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부당하다며 자신의 블로그에 해당 사진과 성기 이미지 자체를 음란물이라고 보는 것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부당하다는 취지의 글을 함께 게재했던 일이 있었다. 1심에서는 벌금형이었고 2심에서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역사적으로 표현의 자유가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은 도전을 받아왔지만 그 중 단연 으뜸은 ‘음란물’ ‘외설’ 판정과의 싸움일 것이다. 예술의 역사는 외설 논쟁과 그 궤적을 함께한다면 과장일까. 예술이란 인생의 희로애락을 담아 승화시키는 것일텐데 사랑을 빼면 그놈의 인생이란 것이 참 맛없는, 앙꼬없는 찐빵과 다르지 않으니 말이다.
인터넷의 폭발적 성장으로 가수 싸이는 지난해 ‘강남스타일’을 유튜브에 공개하면서 일약 전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했다. 이런 시대를 살고 있는 이즈음,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시대를 역행하고 뒤처지는 것은 아닐까. 쉽게 이야기해 촌스러워보이지는 않을까. 예술도 몰라보는 사람처럼 없어보이지 않을까 말이다.
얼마 전 출연한 방송에서 고민을 의뢰한 의뢰인이 “남편이 결혼하고 달라졌다. 야동을 봤다”고 하소연하자 남자 패널이 곧바로 “진실을 알려드릴게요. 당신 남편은 당연히 십여년 이상을 야동을 봐왔고 데이트할 때도 봤으며 결혼하자마자도 봤을 것이고 지금도 보고 앞으로도 쭉 볼 것이다. 남편에겐 달라진 것 없으니 걱정하지 마라”는 솔루션을 내놓아 모두 박장대소하느라 쓰러질 뻔했다.
그렇다고 음란물에 무차별적으로 청소년이 노출될 위험을 마냥 바라볼 수만은 없기에 여전히 뜨거운 감자일 수밖에 없다. 아이돌을 앞세운 선정적인 춤과 노래, 낯뜨거운 성애 장면을 담은 영화, 뮤직비디오, 게임들을 그냥 놔둘 수는 없는 것이 아닌지 말이다. 예술이라 할 수 없는 음란물, 성적 호기심이나 본능적 충동만을 자극하는 질낮은 작품, 성을 살고 파는 매춘같은 작품들로부터 청소년과 순수한 감수성을 가진 독자들을 보호해야 한다.
그런데 다음이 문제이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외설이고 그 기준은 무엇이며 누가 결정하는가 말이다.
‘몸이 반응하면 음란물인 외설, 정신이 반응하면 예술’이라는 말이 있고, 예술은 삶의 진실을 드러내려 애쓰고 외설은 독자들을 조종하려 시도한다는 말도 있다. ‘예술인가 외설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가장 유명하고 동시에 가장 상징적인 대답으로는 포터 스튜어트 미국 연방대법관의 “보면 안다”라는 말이 꼽힌다.
그런데 나는 이 말을 듣고 나니 더 모르겠다. 그런데 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들도 그랬단다. 미국 영화산업이 발달하면서 얼마나 외설시비가 많았는지 1960년대 말부터 연방 대법관들은 일주일에 한번씩 아예 영화 보는 날을 정해놓고 연방대법원 지하에 마련된 상영실에서 문제의 영화들을 보면서 그 음란성 여부를 판단해야 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시사회에서 보인 대법관들의 행태가 흥미롭다. 서굿 마셜 대법관의 경우 항상 맨 앞자리에 앉아 보기를 좋아했으며 간혹 필름 사본을 요청하기까지 하고, 할런 대법관의 경우는 노령으로 거의 실명 단계에 있었음에도 반드시 참석하여 옆에 앉은 동료 대법관들에게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장면들을 묘사해줄 것을 고집했으며 종종 ‘아, 굉장하군!’ 하는 감탄사를 연발했다고 한다(미국을 발칵 뒤집은 판결 31, 현암사). 당연히 이후 열띤 논쟁을 벌이곤 했다고 한다
우리 대법원은 어떨지 궁금하다.

양소영 변호사 5361ys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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