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가 저물어가던 작년 12월말, 고등학교 동기들과 포항에서 송년회를 가졌다. 1박 2일 일정으로 과메기에 소주 한잔을 마시며 회포를 풀기로 한 것이다. 한달 전부터 계획한 모임이었다. 각지에 흩어져 있는 친구들을 만난다니 무척 설레어 굳이 그날의 이벤트나 프로그램을 계획하지 않아도 좋았다. 학창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둘러앉아 밤새 이야기만 해도 좋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출발 당일 새벽부터 내린 눈이 만만치가 않았다. 수십 년 만에 대구 인근에 집중적으로 내린 폭설로 세상이 잠겨버렸다. 포항에서 한의원을 하는 S는 행여 모임이 무산될까 아침부터 조바심을 내며 자꾸 전화를 해댄다. 모처럼의 만남을 연기한다는 것은 언제 다시 모일지 기약할 수가 없는 노릇이다.
포항까지는 11인승 카니발로 이동하기로 했는데, 이례적인 폭설로 대구에서는 체인조차 구할 수가 없는 지경이다. 마침 서울에서 출발하는 J교수가 사오겠다고 한다. 빙판길을 운전해야 할 내 맘이 무겁다. 다들 만남에 대한 기대가 컸던지 좁은 차에 열 명이 몸을 구겨 타고도 설레며 출발을 감행했다.
그날의 만남은 뜨거웠다. 포항에만 있을법한 과메기부터 조개구이까지,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가 무르익어갔다. 신은 인간에게 술과 친구를 주었다고 했던가. 술도 좋고 친구도 좋았다. 취기가 오를 즈음, 서울의 신문사 J부장이 한시 한 구절을 읊조렸다. 그날 어느 조간신문의 ‘한시(漢詩) 마중’이란 코너에 게재된 이언적의 한시였다.

그대들 술 들고 찾아오니 무척 고맙네,
마루에서 마주하여 편안히 마음을 여세.
세밑이라 산 빛이 심심하다 꺼리지 말게,
봄빛이 먼저 얼굴 위에 돌아오지 않겠나.

多謝諸君佩酒來 一軒相對穩開懷
(다사제군패주래 일헌상대온개회)
莫嫌歲暮山光淡 春色先從面上廻
(막혐세모산광담 춘색선종면상회)

마치 우리의 모임을 예견이라도 한 듯, 얼마나 아름다운 축시인가. 게다가 우연히도 이 코너를 담당하고 있는 L교수는 내 중학교 동기였다. 칼바람 불어대던 신천 둑길을 중학교 시절 함께 오가던 친구이다. 이날 그는 함께 하지 않았지만, 우리의 만남을 마치 알고나 있었던 것처럼 때맞춰 절묘하게 글로 표현해준 것이다.
눈 덮인 겨울날 볼만한 경치가 없다한들 어떠하리. 편안히 기울이는 술잔으로 친구 얼굴에 봄빛이 먼저 찾아오니, 그야말로 하늘과 땅 사이에 흥이 끝이 없는 밤이었다.
삶의 굽이굽이를 돌아와 이제야 안정감을 되찾은 친구들, 잠으로 밤을 보내기에는 아쉬움이 너무 컸던 것일까. 노래방을 찾아간 우리는 학창시절에 즐겨 부르던 각자의 노래를 부르며 또 한번 박장대소를 했다.
해고의 위기에서 용케 복직되어 이제는 승진까지 하며 금의환향한 방송국의 C피디가 ‘광화문연가’를 부를 때는 알 수 없는 복받침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이제 모두 세월을 따라 흔적도 없이 떠나갔지만, 주름진 얼굴로 술 들고 찾아가 마주할 수 있는 친구들이 있어 좋다.
아직도 추운 겨울이다. 하지만 그날 친구들 얼굴에 찾아온 봄빛에서 만물이 회생하는 봄을 보았다. 때론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이 고달픈 삶들도 곧 지나가리라. 친구의 얼굴에 먼저 이른 봄빛에서 희망과 생명력을 느끼며 새해의 결심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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