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제18대 대선 와중에 본의 아니게 유명해진 인물이 있다. ‘전’ 경찰대 교수 표창원이다. 그는 ‘희한한 사진’ 한 장을 그냥 스쳐 지나가지 못했다. 그 사진은 여성 수사과장이 국정원 직원의 집 대문에 몸을 대고 있는 사진이었다. 그의 주장인즉슨, “왜 경찰이 불쌍 가련한 모습으로 비쳐지나? 공직선거법에서도 ‘즉시강제권’이 규정돼 있다. 합리적으로 의심할 만한 상황이면 들어가도 된다”는 것이었다.(인터넷 한겨레, 2012년 12월21일)
주지하듯이 이 사건은 야당인 민주당이 대선승패의 명운을 걸고 의혹을 제기했던 ‘국정원 여직원 대선관련 인터넷 여론조작 사건’이다. 대선 며칠을 앞두고 온 나라가 신경이 곤두서 있을 땐데 현직 경찰대 교수가 ‘경찰은 왜 제대로 수사하지 않느냐’고 따지고 나섰으니 충분히 파문이 일만 했다. 사태가 커지자 그는 대선 3일 전에 ‘사표’까지 내던졌다.
나는 그의 사표보다 그가 자신을 ‘보수주의자’라고 고백한 것에 더 놀랐다. 지금까지 난 그런 보수주의자를 본 기억이 없다. 우리나라의 정상적(?)인 보수주의자라면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아니, 누가 지금 그런 걸 모르나? 선거 막판인데, 경찰대 교수라는 자가 눈치도 없이….” 사실 진영논리 차원에서 말한다면, 난 그만큼 ‘비정치적인’ 진보주의자를 본 기억도 없다.
어쨌든 이제 대선이 끝났으니, 표창원이 제기한 ‘진정한 보수주의’에 대해 차분하게 한번 복기해봤으면 한다. 보수주의란 무엇일까? 정말 우리가 그동안 봐온 대로, ‘세상은 어차피 정글이고 법이란 그저 약자를 지배하는 수단일 뿐이니, 빨갱이 사냥이나 해가면서 패권적 권력을 누리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수주의일까? 난 보수주의가 꼭 그렇게 원시적인 이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보수주의자가 싫어하는 것들
그런 보수주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데는 영화 ‘그랜 토리노’(2008)가 적당할 것 같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할리우드의 유명한 보수주의자다. 이런 저런 설명이 필요 없다. 자나 깨나 온 인상을 찌푸린 채 외롭게 담배를 꼬나물고 ‘적’들을 노려보는 그의 이미지는 영락없는 보수주의자 그 자체다.
주인공 월트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병든 노인네다. 그는 포드 자동차회사에서 은퇴한 후 늙은 개 한 마리와 함께 무료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의 집 정면엔 무슨 관공서처럼 항시 성조기가 걸려 있다. 그는 (자신도 폴란드 이민자면서)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아시안 몽족, 남미인, 흑인들이 모두 싫다. 자신의 아들놈이 일본차를 팔고 다니는 것은 더 못마땅하다. 아내 장례식장에서도 손주 녀석들의 옷차림하며,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는 행태 등등 때문에 그르렁거리는 신음소리를 낸다. 한마디로 눈에 보이는 세상이 온통 못마땅하다. 그는 자신의 집 마당을 무슨 요새처럼 홀로 지키고 가꾸며 살아간다.
처음 이웃집에서 일어난 소동에 휘말려 영웅이 된 것도 전혀 월트의 본의가 아니었다. 그는 단지 집 마당 ‘경계’를 얼떨결에 넘어온 녀석들을 처치하려던 것뿐이었다. 이웃집 소년 타오를 동네 갱단에 넣으려는 몽족 녀석들이 바로 그 경계를 넘어선 녀석들이었다. 그들은 타오를 시켜 월트가 신줏단지처럼 모시는 1972년산 그랜 토리노를 훔치게 했는데 실패했다. 그래서 타오를 다시 끌고 가려던 참이었다.

성찰 없는 보수주의가 가능할까
월트에게 한가지 더 못마땅한 일이 있었다. 교회에는 관심도 없는 그에게 젊은 신부가 시도 때도 없이 집착하는 일이었다. 월트의 아내가 죽기 전에 남편의 고해성사를 부탁했다는 것이다. 신부의 노력 끝에 두 사람의 의사소통에 약간의 성과가 있다.
신부: “당신에게 강요된, 아직도 당신을 괴롭히는, 그 끔찍한 일들에 대해 생각해봤어요. 많은 사람들이 죄를 고백하고, 인정하고, 마음의 짐을 내려놨어요.”
월트: “알아줘야겠구만. 한데 틀린 게 있소. 괴로운 건 명령받은 일 때문이 아니오.”
보수주의자 월트가 두 가지 내면의 모습을 내비치고 있다. 한 면은 나라의 명령과 자신의 신념은 어긋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까진 많이 봐온 보수주의자의 모습이다. 관심을 끄는 건 다른 한 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부당한’ 잘못을 자책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보수주의자의 이런 모습은 많이 보지 못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과거사에 대한 성찰 없이 과시욕만 넘치는 보수주의는 진정한 보수주의가 아닐 수도 있다는 영감을 준다.
월트는 흑인 불량배들에게 시달리는 타오의 누나 수를 구해준 뒤 그녀와 친해진다. 타오 어머니는 타오에게 잘못을 노동일로 보상하게 만든다. 처음엔 시큰둥하던 월트는 동네 신세대들과 달리 성실한 타오에게 차츰 우정을 느낀다. 하긴 전통을 지키며 살아가는 타오네 집안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월트는 타오에게 남자다운 말투도 가르치고, 일자리까지 알선해준다. 그런데 몽족 갱단들이 타오를 그냥 두지 않는다. 월트는 그 중 한 놈을 두들겨 팬 뒤 경고한다. 하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큰 사단이 난다.

보수주의자가 불공평한 세상에 대처하는 법
갱단은 총으로 타오네 집을 난사해 경고하고, 수를 납치해 성폭행한다. 타오는 복수를 원하며 월트만 바라보고 있다. 신부가 찾아와 월트를 진정시키려 애쓰며 넋두리한다.
신부: “제기랄, 이건 공평하지 않아요.”
월트: “공평한 건 아무것도 없소, 신부.”
어쩌면 보수주의자가 가장 잘 알고 있는 건 세상의 냉혹함일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강자와 약자가 구별 없이 똑같이 잘 살 수 있다는 이상을 믿지 않는다. 그렇다고 강자가 약자를 부당하게 괴롭히는 현실을 수호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적어도 월트는 그랬다. 월트가 애초에 나쁜 갱단을 몰아낸 건 자신의 집 마당을 지키기 위해서였다지만, 길거리 불량배들로부터 수를 구해준 건 그냥 모른 척 스쳐 지나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보수주의자 월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성급하게 흥분만 하고 있는 타오를 제쳐놓고 월트는 치밀하게 복수를 계획한다. 그는 마지막으로 원하는 일을 하며, 인생을 깔끔하게 정리한다. 그는 타오를 집 지하실에 가둬놓고 홀로 복수의 길을 나선다.
월트는 갱단이 거주하는 집 마당에 서서 그들을 나오게 한다. 말씨름이 시작되고 그들이 총기를 꺼내 겨눈다. 동네사람들이 고개를 내밀고 지켜보고 있다. 월트는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문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가슴에 집어넣은 다음 재빨리 다시 꺼낸다. 갱단의 총구가 불을 뿜는다. 쓰러진 월트의 손에는 총 대신 한국전 때부터 써왔던 라이터가 쥐어져 있다. 갱단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무기도 없는 월트를 난사해 죽인 것이다.

보수주의자의 법
월트는 자신을 희생하고 법을 지켰다. 그의 복수는 법을 깨는 복수가 아닌 법을 지키는 복수였다. 그의 법은 부당한 강자를 싸고도는 법이 아닌 호소할 데 없는 약자를 지켜주는 법이었다. 그것이 보수주의자 월트가 믿는 법이었다.
뒤늦게 경찰의 범인 체포현장에 도착한 타오와 수는 슬픔을 주체하지 못한다. 타오의 가슴에는 월트가 매달아준 훈장이 빛나고 있다. 그 자랑스러운 훈장은 겁먹은 채 항복하려던 타오 나이쯤의 어린 소년병을 쏴죽였던 월트의 고통스런 기억도 담고 있다. 월트는 신부에게 그 일은 고해하지 않았다. 그는 세속적인 속죄의 길을 택했다. 그가 타오의 미래를 지켜준 것은 동시에 자신의 과거를 참회하는 일이기도 했다.
영화의 끝 장면은 월트의 늙은 개와 함께 타오가 그랜 토리노를 몰고 해안도로를 달리는 장면이다. 월트는 집은 교회에 기증하고 아끼던 그랜 토리노는 타오에게 남겼다. 그랜 토리노가 상징하는 착한 전통이 단지 자신의 혈육이나 동족을 통해서만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타오가 ‘진정한 보수주의’자로 훌륭하게 성장해 월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를 나도 바란다.

김욱 서남대 교수
‘영화 속의 법과 이데올로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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