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이맘때. 사법연수원 수료를 한 달 남겨놓은 시점에서 내가 선택한 진로는 다름아닌 ‘방송기자’였다. 법조인과 기자. 그다지 연관성 없어 보이는 두 가지 직종이 의외로 멋지게 잘 어울릴 수 있다고 주위에 설파했으나, 사실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기자가 되고 싶었고 고시공부를 하면서도, 심지어 연수원을 다니면서도 각종 언론사의 공채 시험장을 기웃거리던 얼치기 연수생이었다. 결국 연수원을 수료하고 나서도 기자가 되기로 결심한 건, 그야말로 ‘못해보면 죽어서도 한이 될 것 같아서’였다.
동기들은 내 엉뚱한 선택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너라면 잘 어울릴 것 같다고 격려를 해줬고, 지도교수님들은 니가 하다하다 별일을 다 한다면서 정신차리라고 말리셨다. 하지만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부모님이 반대하는 결혼을 기어이 하고 마는 주인공을 보면 참으로 한심하다 생각했었는데, 지나고 보니 내가 딱 그 짝이었다.
모 방송사에 법조인 출신의 기자가 왜 필요한지 구구절절하게 편지를 보내고 수도 없이 전화를 해서, 마침내 계획에도 없던 ‘법조전문기자 공채 전형’까지 만들었다. 꿈에 그리던 공지를 보고 얼마나 감개무량했던가! 서류 전형, 카메라테스트, 임원면접 3단계의 전형과정마다 정말 혼을 다해 임했다. 지도교수님은 연수원 때 그렇게 공부를 좀 열심히 해보지…라고 혀를 끌끌 차셨지만 어쩌란 말인가. ‘각’자를 여기 붙였다 저기 붙였다 하는 연수원 공부보다, 기사 작성과 리포팅 연습이 비교도 안 되게 재미있었으니 말이다.
다행히 합격했고 수습기자로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수습기자’. 정말 갖고 싶었던 직함이었기에 뛸 듯이 기뻤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때만 해도 나는 몰랐다. ‘수습기자’ 라는 단어는 그 바닥에서 고난과 인내와 굴욕의 아이콘이라는 것을….
흔히들 기자사회를 군대와 비교한다. 군대를 가보지 못한 나는 알 수 없지만 남자 동기들이 “군생활보다 더하다”며 혀를 내두른 걸 보면 아마 그런가보다 짐작할 뿐이다. 일단 1진 밑에 2진, 2진 밑에 말진이라는 ‘계급’은 군대보다도 더 확고한데, 나로 말하자면 말진에도 끼지 못하는 수습이었으니, 이제 막 입대한 훈련병 신세였다고 할까. 그 중에서도 나는 특히 고문관에 가까웠다. 1진 기자실과 2진 기자실이 따로 있는 것도 모르고 떡하니 1진 기자실에서 자고 일어나 선배들을 기함시켰으며, 1진 기자가 먼저 말을 걸어주기 전에는 내가 먼저 말을 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명랑하게’ 말을 걸었다가 대굴욕을 겪기도 했다.
그러는 와중에 난 내가 그토록 하고 싶었던 기자라는 직업이, 실은 내게 매우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건을 접할 때마다 그 이면에 숨은 진실을 캐내기 위해 끈질기게 매달리고 캐물어야 하는 오기와 끈기가 내게는 전혀 없었다. 게다가 합법과 불법의 경계에서 묘하게 줄타기를 해야 하는 취재기법은, 모르면 모를까 법을 아는 나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대관절!! 어떻게 형사과장의 책상서랍에서 당직사건 기록부를 빼오란 말인가. 당장 머릿속에서 생각나는 죄책이 서너 가지는 되는데 말이다.
물론 얻은 것도 많다. 짧으나마 기자생활은 책상물림으로 살아온 내게 세상을 보는 시각을 넓혀주었다. 한밤중 경찰서 유치장에 모여 있는 그 많은 인간군상과 각각의 사연들, 새벽 3시의 마약 단속반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내가 기자가 아니었다면 죽어도 몰랐을 테다. 처음 내 리포트가 방송에 나오던 순간의 환희와 정치부 출입시절 접했던, 모 대선 후보의 따뜻한 면모와 인간미 또한 잊혀지지 않는 훈훈한 추억이다.
또다시 겨울이다. 겨울이 오면 그 시절 기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동분서주하던 나의 모습과 졸음을 참아가며 사건을 취재하던 날들이 떠오른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참 엉뚱하다고 비웃을지 모르는 나의 첫 직업은, 하지만 이제는 추운날 발을 동동 구르며 걸음을 재촉하다가도 문득 떠올리며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머금게 하는 지나간 추억이자 든든한 나의 자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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