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가쁘게 달려 온 한 해가 불과 며칠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이런 저런 생각이 많아지는 요즘이다. 새해를 시작하며 꿈은 야무지게 꾸었지만 결국 계획으로 그치고 만 일들, 미안하고 부끄러운 일들에 생각이 미치자 후회가 밀려든다. 그런가 하면 마음 한 켠에서는 다시 새로운 계획과 다짐이 일어난다. 새해에는 이러 저러한 것을 해 보리라, 좀 더 멋진 사람이 되어 보리라 하고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멋진 사람이란 나이 들어가면서 연륜에 걸맞은 품위를 갖춘 사람이다. 살아 온 세월만큼 지혜가 빛을 발하고 인품의 향기가 은은히 배어나는 사람, 끊임없이 자신을 연마하고 성취해 나가면서도 넉넉한 심성으로 주변을 감싸 안는 사람, 덕을 쌓고 나누고 베푸는 사람. 그런 사람이 정말 멋진 사람이다.
주변에 이런 멋진 사람들이 많아서 배우고 닮아야 할 본보기를 쉽게 찾을 수 있다면 이 또한 아주 행복한 일임에 틀림없다. 바라건대, 비록 내가 그 경지에 이르진 못한다 해도 그들에게 감동하고 본받으려 애쓰다 보면 조금은 더 괜찮은 사람이 되지 않을까.
앞의 글에서 나는 부산지역 법조계에 무늬만 신사가 아닌 진짜 신사들이 아주 많고 기회가 닿는 대로 그분들을 알리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우리 지역 법조계의 멋진 사람들을 이니셜로 칭한 것은 혹 내 짧은 글이 그분들의 참모습을 제대로 알리지 못하고 누가 될까 염려함이요, 굳이 이름을 밝히지 않아도 알 사람은 다 알 것이라 생각해서다.

H 변호사: 나누고 베푸는 미덕
독서모임이 끝나고 서로 서로 인사를 나누며 뿔뿔이 흩어지기 직전, 그의 승용차 트렁크가 열릴 때면 사람들은 늘 기대와 예감으로 설레했다. 그 안에는 사람들에게 나눠 주려고 그가 준비해 온 꽃과 책 꾸러미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정도의 사회적 지위를 가진 그 연령대의 남성이 타는 승용차 트렁크에 예외 없이 들어 있을 그 흔한 골프백이 거기엔 없었다. 대신 철을 따라 노랗고 향기로운 프리지아, 빨강 혹은 보랏빛 아네모네, 흰색의 목을 쭉 뽑아 올린 카라, 취할 만큼 향기 짙은 백합 등이 신문지나 홑겹의 투명비닐에 싸여 있었다. 때로는 잎새 없이 높다란 줄기 끝에 외롭게 꽃만 덩그마니 달린 꽃무릇, 내 친정어머니가 가끔 쥐발톱이라며 그 이름을 헷갈려 하는 매발톱, 그의 마산 본가 마당에서 자라던 은방울꽃 등이 심긴 플라스틱 화분들이 실려 있었다. 그 꽃과 식물들은 그의 트렁크 주위에 둘러 선 사람들에게 고르게 나누어졌고 남자들도 수줍어하며 그에게서 꽃을 건네받았다.
간혹 모임에 빠진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거나 여분의 꽃이 있을라치면 나는 뻔뻔스러움을 마다않고 또 손을 내밀었다. 메마르고 건조한 심성이 되기 쉬운 법조인들에게 그는 그렇게 꽃을 빌어 자연과 아름다움, 여유와 휴식을 선물했다.
그가 나눈 것은 비단 꽃만이 아니었다. 오래 전부터 그는 책 나눠주는 판사로 알려져 있었다. 그가 근무했던 법원 어디서나 독서모임을 만들고, 정원을 가꾸고, 직원들에게 책을 아낌없이 나눠주었다. 변호사가 된 이후에도 그의 책나눔은 변함없이 계속되었고 그를 찾아온 손님들은 상담료를 내야 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변호사로부터 책을 선물로 받았다.
그가 늘 새 책만 나눠주는 건 아니었다. 그는 대학 시절에 밑줄 긋고 여백에 메모해 가며 읽은 손때 묻은 낡은 책들도 주저하지 않고 후배들에게 내어주곤 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교장이셨던 부친과 서점을 운영한 모친 덕분에 이만큼 교육받고 살아왔으니 그 은혜를 이렇게나마 세상에 갚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늘 자신을 낮춘다. 하지만 그가 사들이는 책의 분량과 가격을 보면 그것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님을, 책을 좋아하고 돈이 있다고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님을 나는 잘 안다.
언젠가 그에 대한 인터뷰 기사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책 선물은 좋은 씨앗을 뿌리는 것과 같다고, 언젠가는 싹이 트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 마련이라고.
그는 이렇게 책을 나눔으로써 세상에 지혜와 용기를 선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나누고 베푸는 미덕은 그를 멋진 사람이라 하기에 충분하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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