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며칠 사이 추워도 너무 춥고, 눈이 내려도 너무 내려, 계절조차도 변절한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이고, 사고까지도 혼란이 올 정도입니다.
계절조차도 변절하고 배반을 하는 세상이니 인간사에 있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겠지요. 지식인으로서 세상 살아가기가 참으로 어렵다고 어떤 분이 한탄했던 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 인간이 일생을 마감하면서 참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더없이 행복한 일이겠지만, 세상 살아가는 일이 그리 녹록한가요.
특히 한 사회에서 한 시대를 풍미하고, 영향을 미쳤던 뚜렷한 지식인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한 듯합니다. 지식인이란 무엇인가요.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고, 또 그 흐름에 영향을 미쳐 자신이 사고한 바람직한 방향으로 시대정신을 형성하려 끊임없이 고민하는 부류의 집단이 아닐까요.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고,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형성하려는 두 가지 요소가 같이 가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 지식인의 개인적인 성향이 겹쳐지면 사정은 더욱 복잡해지는 듯 싶습니다.
역사상에는 무수한 배신과 변절의 사례가 있습니다.
가까이 회자되는 것이 일제 강점기의 친일행적입니다. 그 중에서도 이광수, 최남선, 윤치호 등이 많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이들의 변절이 개인적인 영달을 위한 것이었다면, 그들에 대한 인간적인 비난으로 족할 것이고, 상대적으로 아주 단순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변절이 근본적인 철학과 시대정신 그리고 정의의 관념과 관련된 것이라면 문제는 좀 더 심각하고 복잡해질 듯 싶습니다.
일제강점기라는 민족적 위기의 시대이었기 때문에, 민족의 독립이나 민족혼의 말살위기 등 그 갈등구조가 단순하고 또 가치의 판단을 위한 변수가 뚜렷하게 보여짐에도 그들과 같은 1급 지식인이 잘못된 판단을 하였다는 것은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많은 측면이 있지만, 역설적으로 지식인이 지식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더욱 실감하게도 합니다.
요즈음 대선판이 무르익으면서 크게 요동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이합집산하는 모습이 그리 아름답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들의 이합집산이 자신의 철학이나 역사인식에 기초한 것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욕망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와중에 김지하 시인이 보수단체가 주관하는 행사에서 여당후보를 지지하는 것으로 보여지는 맥락의 강연을 한 것이 크게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오적의 시인, 독재에 항거하고 민주주의를 위한 제단에 자신을 바친, 김지하 시인이 그와 같은 내용의 강연을 한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일 것은 너무나 당연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 개인적으로는 김 시인의 강연내용이나 그 행적이 충격은 아니었습니다. 수년 전부터 저는 정기적으로 고 박경리 선생님을 원주의 토지 문학관으로 가 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그분의 사위인 김지하 시인을 만나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나는 김지하 시인의 인간적인 모습과 사상가, 시인으로서의 모습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모두 볼 수 있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독재시대에 겪은 고난의 후유증으로 망가진 몸을 되살리려는 처절한 모습을 보았고, 사상적으로는 더욱더 인간의 영성이나 생명사상에 입각한 역사관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김 시인의 위 강연이 최소한 개인의 이익이나 영달을 위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사상적 맥락을 따른 것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의 사상적 맥락이나 역사의식이 이시대의 흐름을 정확히 읽어내고 올바른 것이었는지에 관한 질문은 너무나 어렵고 복잡하여 다른 차원에서 논할 문제라 생각합니다.
여기까지 오게 되니, 이광수, 최남선, 윤치호의 경우나 더욱이 최근 대선판에서 이합집산한 모든 사람들도 인간적으로는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역사는 언제나 냉혹한 판단을 하기 때문에 지식인으로서 살아가기가 참으로 어려운 것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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