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지난 가을은 참으로 즐거웠습니다.
어머니의 얼굴을 가만히 살펴 봅니다. 어머니가 눈치채지 않게 몰래 훔쳐 봅니다. 어머니와 나의 나이차이와, 모자관계라는 고정적인 틀을 벗어나서 어머니의 인생 그 자체를 만나야 하겠다는 강렬한 내적 요구를 받게 됩니다. 어머니의 노안(老顔)에는 10대, 20대, 30대의 기억도 고스란히 숨어 있을 것입니다.
다행히 어머니의 사진들이 드문드문 불을 밝히고 서 있습니다. 초등학교 졸업식 때 찍은 단발머리 소녀의 얼굴, 20대 말에 벌써 아이 넷의 엄마가 되어 찍은 가족사진, 아마도 그즈음 친구들과 함께 전남 진도군 접도에 놀러 가서 검은 갯바위 위에 앉아 찍은 사진, 서울 박람회에 구경가서 찍은 것, 나의 중학, 고등, 대학 졸업식 때 찍은 것들입니다. 젊으신 어머니는 모두 밝고 환하고, 그중에서도 대학교정에서 우아하게 앉아 있는 사진이 무척 아름답습니다.
어머니 사시던 곳에서 배가 들어오는 해창(海倉)까지는 아마도 15㎞는 될 터인데, 외숙부님이 방학이 되어 돌아 오는 날에는 외할머니와 함께 부두에 나가 기다리다가 배가 저 멀리서 모습을 드러내고 외숙부님이 갑판에서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이면 어머니와 할머니도 함께 손을 흔들어 반가워했다고 하였지요. 초등학교에 다녔을 어머니의 소녀상이 얼마나 귀여웠을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먼 길을 걸어서 오고가고, 그리고 선창과 출렁이는 푸른 바다와 그리웠던 오빠를 배웅하는 상큼한 정서가 어려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성장하여 가는 동안 어머니를 연모의 눈길로 주목하고 있던 청년이 왜 없었겠으며, 어머니 또한 봄날의 동경심을 느끼셨겠지요.
어머니가 결혼할 당시는 일제가 강점한 암흑기였고 전쟁의 막바지에 생활이 극도로 피폐하였던 때라 어머니도 시어머니와 함께 밭일을 나가셨고, 집에서는 길쌈도 직접 하였습니다. 나는 어머니가 베를 짜는 모습은 보지 못하였으나 그 베틀이 남아 있는 것은 보았습니다. 진도아리랑의 노랫말에 ‘달그락 달그락 짜는 베는 언제나 다 짜고 친정에를 갈까나’하는 내용이 있는데 어머니도 섬세한 명주며, 모시, 그리고 무명을 짜느라 몹시 힘이 드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옷감들을 무척 소중하게 여기셨고, 그것으로 가족들의 옷을 지어 입히는 것을 큰 보람으로 여기셨습니다.
일제 재봉틀은 당시 가격이 비쌌는데, 어머니가 과감히 구입해서 가족들의 옷을 직접 만드는 데 사용하였습니다. 옷 만드는 법은 어디서 배운 것인지를 묻자 “배우기는…그냥 어깨 너머로 보고 하였던 것이지” 하셨습니다. 나일론 옷감이 처음 나왔을 때 우리들의 여름옷을 멋지게 만들어 주어 흡족하여 했던 것을 기억하는데, 그때도 번화가의 의류점에서 옷들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보고 와서 직접 만들었다고 하셨습니다.
어머니의 젊은 시절을 돌아보는데 어찌 사진에만 의존하겠습니까. 제 가슴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어머니의 모습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르던 날, 학교정문 앞에서 시험에 합격하기를 기원하다가 시험을 마치고 나오는 우리들에게 활짝 웃어 주시던 어머니, 아버지가 편찮으셔서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하시고 난치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던 절망적인 날, 그날 나는 데모에 참가하고 교정은 최루가스로 자욱한 그 시각에 어머니가 간병을 하던 차림 그대로 학교로 찾아 오셨을 때의 모습, 그런 모습들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때때로 암매하고 유약한 아들이 일으킨 황당한 문제 앞에서 놀라고 염려하시던 어머니의 슬픈 얼굴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눈앞에 계시는 허약한 늙은 분만은 아니라는 나의 추상(追想)은 나를 어머니의 젊은 날을 애써 찾아 나서게 합니다.
아들로서 어머니의 삶을 모두 잘 알 수는 없습니다. 아들이기 때문에 모르는 일도 많습니다. 그래서 가끔 지나간 어떤 사건에 대하여 오해를 하고 있는 나에게 어머니는 “야는 그것도 잘 몰랐구나…” 하면서 사건의 내용을 바로잡아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들로서 간직하는 어머니의 존재는 어머니의 삶속에서 가장 소중한 부분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어머니의 손길은 부족하기만한 나를 늘 따스하게 어루만져 주십니다. 내 마음에 소원하는 바가 있는데, 그것은 이미 늙어버린 아들이라 할지라도 어머니가 없는 곳에서도 혼자서 애써 하고 있는 일들이 어머니가 기뻐하는 일이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어머니께서 살며시 엿보고 기뻐하고 안도하는 마음으로 돌아서는 그러한 아들이고 싶습니다.
어머니, 내가 잠들어 있을 때도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모두 감당하셨을 어머니, 나의 많은 허물과 미약함에도 불구하고 크고 밝은 꿈을 잃지 않도록 항상 기도해 주시는 어머니, 나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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