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전남 고흥에 있는 시골마을 어느 조손가정에서 촛불 화재로 할머니와 여섯살짜리 손자가 숨졌다는 신문기사를 보았다.
전기요금 15만7740원이 밀려 지난달 말 한전으로부터 전류제한 조치를 당해 촛불로 생활을 했다고 한다. 전류제한조치를 받아도 전등 하나 정도는 사용할 수 있지만 할머니는 요금체납이 부담됐던지 전기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조부모와 어린 손자는 한겨울보다 더 추운 초겨울 밤을 어둠과 추위에 떨면서 지내왔던 것이다. 그러다가 잠을 자던 손자가 오줌을 눈다고 하여 촛불을 켰다가 불이 났고 미처 피하지 못해 참변을 당했다고 한다.
이 기사를 읽고 나에게는 떠오르는 아이가 하나 있었다. 벌써 30년 전의 일이다. 내가 살던 농촌 마을은 다들 가난하고 평범했지만 유독 특별히 가난한데다가 엄마도 없이 늙은 아버지와 단둘이 살던 친구가 있었다. 두메산골이기는 했지만 1980년대이기 때문에 전기가 모두 들어왔고 마을 어귀에 가로등도 있었다.
그러나 단 한 집, 인선이네 집은 여전히 호롱불을 사용했다. 게다가 인선이가 살던 집은 당시에도 보기 드물었던, 움막처럼 푹 꺼진 초가집이었다. 내가 어릴 적 살던 시골 마을을 떠올릴 때마다, 매년 이엉을 해대기도 어려워 썩은 짚이 얹혀 있던 그 아이의 집이 떠오르는 것은 어린 나에게도 그들의 가난은 아주 특별하고 참혹해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인선이는 나와 같은 반 친구였고, 출생신고는 같은 해로 되어 있었지만 나보다 몇 살 위였다. 인선이는 늘 자기가 세살쯤 많다고 얘기를 하면서 동네의 세살 많은 언니들과 반말을 트기 위해서 무던히 노력을 했다. 그래도 내 친구들이 이름 부르는 것에 개의치는 않아 잘 어울려 놀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던 어느 초겨울이었다. 아마 이맘때였을 것이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서 더 이상 밖에서 놀기가 어려워졌을 때였다. 엄마가 없던 인선이는 부엌에서 군불을 때다가 미처 뒷마무리를 하지 못한 채 잠이 들었고 남아있던 불씨들이 옮겨붙어 가난하기 이를 데 없는 작은 초가가 모두 불타버렸다. 다행히 몸을 피하긴 했다.
추운 겨울 몸을 누일 곳 없었던 인선이와 늙은 아버지는 빈방이 있던 이 집 저 집을 돌아다니며 각자 겨울을 났던 것 같다. 그럭저럭 힘겨운 겨울이 지나고 얼었던 땅이 풀릴 때쯤 마을 사람들은 소금을 풀어 시멘트를 개기 시작했다. 마을 장정들이 모두 도와 며칠 지나지 않아 작은 벽돌집이 지어졌다. 연탄보일러도 달아주었기 때문에 인선이는 더 이상 추운 부엌에서 혼자 군불을 지피면서 꼬박꼬박 졸 필요가 없게 되었다.
집이 다 지어졌을 때 마을에서는 국밥을 끓여 조촐한 잔치를 했는데, 그날 보았던 인선이의 환한 얼굴이 아직 떠오른다. 중학교부터 도시에서 학교를 다니게 된 나는 그 후 인선이를 본 적이 없다. 얼마 못 가서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도시에 살고 있었던 언니한테 갔다고 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나고 너무도 눈부신 발전을 이룬 대한민국에서 고흥 조손가정 화재사고는 우리 사회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묻게 한다. 15만원이 없는 이웃에게 전류제한조치를 마구 해대면서 혹시 이런 사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한번이라도 해보았는지. 아이가 있는 가정이란 것을 알았다면 좀 더 세심하게 살피는 복지체계를 마련할 수는 없는 것인지 답답하고 안타깝다.
모두 가난한 시절이었지만 빈 방을 내 주면서 따뜻하게 겨울을 나게 하고, 십시일반 돈을 모아 작은 집을 지어주고 함께 행복해했던 그 시절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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