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시작되자마자 또 어김없이 그분이 찾아오셨다. 꽉 막힌 코 때문에 머리는 띵하고 눈앞은 어질어질하다. 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많건만 몸은 내 것이 아닌 듯 천근만근 무겁기만 하다. 생각해보면 기억이 닿는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찬기운이 돌 때면 항상 감기로 고통스러웠던 것 같다. 감기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하면 내 일상의 행복을 한 움큼 뺏기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감기는 무조건 빨리 떠나보내야 할 괴로운 손님처럼 여겨지곤 했다.

헌데 감기를 핑계로 집안일도, 육아도 잠시 미뤄둔 채 침대에서 뒹굴다보니 예전에 읽었던 감기에 대한 책 한 구절이 떠오른다. 동의보감을 고전평론가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그 책에서는 ‘감기는 나의 운명’이라고 명명했었다.

모든 존재는 천지만물이 벌이는 기운들의 각축 속에 살고 있기에, 산다는 것은 몸과 외부 사이의 ‘기싸움’이라 한다. 때문에 생명을 유지하는 한 이 기싸움은 결코 멈출 수 없고, 삶이 있는 곳에 늘 병이 따라다닌다는 것이다. 특히 감기(感氣)는 그 의미 자체가 ‘외부의 기에 감응한다’는 의미이니, 모든 병은 감기의 변형이나 마찬가지라 했다.

감기가 곧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라니 참 흥미로운 해석이다. 사실 태어나서 가장 처음 앓는 병도 감기이고 죽을 때 가장 많은 병도 감기이고 보면, 생사를 함께하는 병이라는 의미가 낯설지만은 않다.

고민으로 밤새 괴로워할 때, 아픈 이별을 경험할 때, 과로와 음주로 몸을 돌보지 않을 때, 그것은 수시로 찾아와 굽이굽이 인생 고락을 함께하기도 한다. 또한 아무리 빨리 털어내고 싶어도 제 스스로 떠나기로 마음먹을 때까지 반드시 일정 시간을 같이 보내야 한다.

그러고 보니 감기를 얄미운 불청객 정도로 홀대할 게 아니라,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반가운 인사 한번쯤 건네는 것이 현명할지도 모르겠다. 마음을 바꾸고 보면 감기도 그저 괴로운 병만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내가 오늘을 살 수 있게 지탱해주는 사랑의 전령이자, 분수를 잃고 날뛰는 내 욕심과 무절제에 경종을 울리는 현자인지 모른다.

어린 시절 호된 감기를 앓던 기억에는 항상 엄마의 다정한 목소리가 함께였다. 엄마는 “에고, 내 새끼야” 라고 안타깝게 나를 부르며 따뜻한 손길로 머리를 쓸어주셨다. ‘내 새끼’라는 그 원초적이고 사랑스러운 호칭을 듣고 있노라면 감기를 견디기가 훨씬 수월했다. 그래서 내 아이가 감기로 밤잠을 못 이룰 때 작은 몸을 품에 꼭 안고 달래다보면, 내 입에서도 자연스레 “에고, 내 새끼야”라는 말이 흘러나온다. 감기를 낫게 하는 건 약도, 밥도 아니고 엄마의 그 애정어린 말이었다는 것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면, 마치 감기를 통해 내 어머니로부터 받은 사랑을 내 아이에게 고스란히 전해주는 느낌이다.

성인이 되어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뭐든 내 맘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을 때 감기는 매번 내 발목을 붙잡았다. 아니, 내 삶의 중심을 잡아주었다. 젊음이 좋아 미친듯이 밤을 새우고, 사람이 좋아 정신없이 술을 마시고, 일이 좋아 무턱대고 일을 떠맡다보면 덜컥 감기가 찾아왔다.

기운이 팔팔할 때는 세상이 만만해 보이다가도 감기로 기력이 빠지면 비로소 나의 부족함이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너무 기세 등등 살지는 않았는지, 과하게 무리하지는 않았는지, 못 견디게 외롭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곤 내 역량을 넘어서는 것들을 덜어내고 나면, 보다 본질적인 것에 충실할 수 있었다. 그러면 어느새 감기는 제 일을 마치고 조용히 사라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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