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성변호사로부터 이메일이 왔다. 대충의 내용은 이랬다. 사법연수원 34기인 성정모 변호사는 경찰서나 구치소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여러 차례 무시와 수모를 당했다. 심지어 형사가 몰래 의뢰인에게 이런 말도 지껄였다.

“변호사를 사려면 전관이나 나이 많고 경험 많은 사람으로 해야지 저런 아줌마를 사면 되나?”
나중에 피고인으로부터 얘기를 전해 듣고 그녀는 허탈감에 빠졌다. 전관출신도 아니고 일류대학을 나오지도 않았다. 그러나 변호사로서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은 누구보다도 강했다. 현실의 벽에 부딪혀 ‘변호사를 계속해야 하나’하는 회의가 일었다.

절망감이 엄습했다. 대한민국은 여성변호사를 전문 직업인으로 대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요즈음 변호사라는 직업이 어디까지 추락할지 그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어느 날 오후 나이 먹은 변호사가 형사에게 당한 얘기를 읽고 동병상련(同病相憐)을 느꼈다. 서울 서초경찰서의 한 형사가 검경수사권조정이 담긴 대통령령에 형사나 검사가 언제든지 수사에 입회한 변호사를 쫓아낼 수 있다는 규정이 생겼다면서 변호사를 은근히 협박했다는 내용이었다. 수모를 당해본 여성변호사는 역시 모멸당한 선배변호사에게 당당하게 변호사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그날이 오길 간절히 바란다고 전했다.

헌법과 형사소송법에 접견권이 절대적으로 보장되어 있는데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 억울한 일을 당한 기결수를 만날 수도 없다. 선임계부터 보자는 건 변론을 방해하는 활동이다. 수사 입회권을 제한하는 대통령령이 제정될 때 아예 변협은 배제됐다.

법정에서도 변론보다 소송지휘가 앞선다. 내 경우 삼십대 초부터 변호사를 하면서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았다. 형사나 검찰직원, 법원서기의 의도적인 무시에 자존심은 피를 흘렸다. 자기 덕에 먹고 사는 것으로 착각하는 판·검사의 교만에 속이 뒤틀렸다. 돈을 주고 변호사를 산 듯 방자한 의뢰인에게 정이 떨어졌다. 신음소리가 날 정도로 영혼이 괴로워도 가족조차 고통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만두고 싶었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기도하면서 나를 돌아보았다. 자신도 지키지 못하면서 남의 인권을 보호해 주겠다는 변호사는 가짜였다. 권력 앞에 한없이 나약하면서 남을 지켜주겠다는 건 허위다.

나는 싸우기 시작했다. 내게 변호사란 싸우는 직업이었다. 전관출신은 달랐다. 자기만은 영장기각률이 다른 이에 비해 훨씬 높다는 전관변호사의 자랑도 들어봤다. 그들은 근무하던 직장의 동료나 후배들에게 사정했다. 소중한 인연을 돈과 바꾸려는 장사꾼으로 보였다. 각자 입장이 달랐다. 나는 전방위로 싸움을 시작했다. 이기기 힘들었다. 하나님께 같이 죽을 용기를 가지도록 해 달라고 빌었다. 트집잡고 고소하는 악질의뢰인과 절대 타협하지 않았다. 권력의 오만에 대해 발톱을 세우고 이빨을 드러냈다. 그 과정에서 나는 변호사야말로 호랑이 새끼라는 걸 깨달았다.

무시하고 능멸하던 상대방들은 기껏해야 꼬리를 말고 달아나는 늑대나 개에 불과했다. 그들은 완장을 잃어버릴까 전전긍긍했다. 변호사들은 공통의 분노를 하나로 모으지 못한다. 모두들 “좀 어떻게 해줘”라고 하지만 그걸 해줄 실체는 없다.

모래알 같은 변호사들이 뭉쳐야 한다. 1만2000명의 목소리가 합쳐지면 천둥이 될 수 있다. 단결만 하면 절대 권력도 붕괴시킬 수 있다.

각자의 아픔을 변협신문에 기고하거나 나의 이메일로 보내줬으면 좋겠다. 그걸 모아 엄청난 에너지로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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