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열풍의 진원지인 제주에는 2007년 가을부터 제주 올레길이 열리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25개 코스가 개설됐다. 이에 더하여 올해 6월과 9월에 순차로 기독교와 천주교 순례길이 각 개설되고, 10월에는 불교순례 제1길(지계의 길)이 개장됨으로써 향후 ‘힐링’ 관광 상품으로 주목받게 될 것이다.

제주 올레길과 지리산 둘레길의 성공을 보고 전국 시, 군마다 너도나도 걷는 길을 만들어 불과 몇 년 사이에 전국적으로 둘레길, 해안길, 숲길, 성곽길, 옛길 등 걷기 좋은 길들이 앞다퉈 조성됐다.

지난해 세계 7대 자연경관으로 선정된 제주에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평일과 주말 할 것 없이 울긋불긋한 배낭 하나 짊어지고 등산복을 차림으로 타박타박 걸어가는 수많은 관광객들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걷기에는 어떤 미학이 있기에 사람들로 하여금 길 위에 서게 만드는 것일까.

건강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된 걷기 열풍이 이제는 거기서 더 나아가 걸으면서 내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명상을 한다는 데 그 이유가 있다. 천천히 걸으면서 발바닥의 촉감을 느끼거나, 들숨과 날숨, 호흡의 완급을 알아차린다. 느리게 걸으면서 오름과 숲길, 푸른 바다와 파란 하늘과 뜬 구름을 손님으로 맞이하면서 있는 그대로 그 자연의 느낌을 알아차린다.

그러나 적지 않는 사람들은 걸으면서 동행자들과 대화를 하거나, 과거의 일을 회상하거나 미래의 일들을 떠올리면서 ‘지금 여기’에 깨어 있지 않는다. 걷는 것이 좋은 것임을 알지만 시간이 없어서 못하는 변호사들이 제법 많다. 나의 경우도 그런 축에 든다. 왜냐하면 주말에 내자와 함께 농장에서 농사일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부부는 주말 농장 일을 일시 멈추고 불교순례 제1길 개장식에 참여했다. 지계의 길을 열기에 앞서 순례자들은 목탁소리에 맞춰 동네사람들을 위한 ‘아름다운 탁발’행사에 동참했다. 체로금풍(體露金風)의 가을 날씨는 걷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해안마을에 있는 관음정사부터 한라산 관음사까지 14.2㎞의 길은 차가 다니는 신작로가 아닌 마을 옛길을 따라 조성된 길이다. 해안마을에 살았던 선인들이 한라산 산신기도를 드리려고 다녔던 오솔길, 숲길이다. 다만 길이 평탄하지 아니하고, 계곡미가 뛰어난 한천 계곡의 울퉁불퉁한 길은 걷기에 좀 불편하기도 했고, 또 여정의 중간을 지나면서 가파른 비탈길이 있어서 초등학생이나 노인들에게는 좀 버겁다는 것이 문제였다.

목적지가 가까워지면서 발가락과 관절에 느껴지는 육체적 고통은 더 심해졌다. 약 3시간 반의 걸음 후에 ‘소산오름’의 편백나무와 삼나무 군락 길에 이르렀다. 이 나무들은 일본을 본토로 하는 외래종이지만 제주에서 토종 나무들과 천연덕스럽게 잘 어울려 그 자태를 뽐내고 있다. 피톤치드와 테르펜 방출량이 많아 걷는 이들에게 청량감을 느끼게 하는 유익한 나무이다.

모자 아래로 비 오듯 흘러내리는 기분 좋은 땀이 숲길 사이에 불어오는 청량한 바람에 씻겨가고 오감을 활짝 열고 천천히 숲길을 걸으면서 싱그러운 숲이 주는 생명 에너지를 있는 그대로 온전히 느꼈다.

여정의 끄트머리인 관음사에 이르렀을 때 출발 시 2000여명이었던 순례자들은 200여명으로 줄어들었다. 그 중에는 초등학생과 70대 노인들도 더러 있었는데, 아마도 그들은 범계(犯戒)를 하지 않고 지계를 하겠다는 일념으로 완주를 하였을 것이다. 지계의 길을 완주한 순례자들의 마음이 다 똑같은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길(路) 위에서 길(道)을 찾으려는 마음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득과 명성과 칭찬이라는 세풍에 휩쓸려 살다보면 속도와 질주의 무한경쟁으로 마음은 중심을 잃고 고통과 번뇌로 얼룩지고 만다. 이런 때일수록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찌든 오염된 마음을 참회하며 선한 마음을 드러내기 위한 정진이 필요하다. 불교에서는 이를 두고 행선(行禪)이라 말한다.

걷기 명상은 늘 현재의 자기 몸과 마음을 바르게 알아차리는 것이며, 현재의 삶에 충실할 수 있는 좋은 수행이다. 왼발과 오른발을 교차하면서 두 발로 땅을 내딛는 단순한 동작에 마음을 집중하면 난마처럼 얽힌 생각도 사라지고 몸과 마음은 한결 가벼워진다. 행선을 통해 정진력을 키우고, 그 정진력으로 고요함을 얻어서 지혜가 샘물처럼 솟아난다.

내면의 휴식과 청청함을 찾아서 내일도 모레도 신발 끈을 매는 변호사들이 많아질 것으로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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