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하대 경문왕은 왕위에 오른 후 귀가 당나귀처럼 갑자기 커졌다. 이 사실을 유일하게 알았던 이는 왕의 두건을 만들었던 복두장이었다. 창피했던 왕은 복두장에게 비밀을 지키라고 단단히 일러두었지만 입이 근질거리고 답답해서 병이 날 것만 같았던 복두장은 어느 날 대나무 숲 깊숙한 곳에 들어가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쳤다. 그 후 바람만 불면 대나무 숲에서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소리가 울려나왔다고 한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 경문왕 설화에서 대나무 숲은 ‘마음깊이 답답한 것을 표현할 수 있는 상징적 공간’이다. 백성들은 대나무 숲으로 가서 위정자에 대하여 폐부에 담았던 말들을 뱉어내면서 살아갈 힘을 얻고 여론을 만들기도 했다.

최근 SNS에는 출판사 옆 대나무 숲, 방송국 옆 대나무 숲, 국회 옆 대나무 숲 같은 이름의 트위터 계정들이 활발히 생겨났다. 이러한 계정들은 설화 속의 대나무 숲이 인터넷 세상에 맞춰 진화한 것이다. 절규와 탄압이 교차하던 설화 속의 대나무 숲이 현실에서 다시 생겨난 것이다.

우리 법조계에도 이러한 공간이 필요한 것 같다. 대나무 숲은 자기 생각들을 언제나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것을 공개적으로 말한다면 불이익을 입을 것 같은 사람들의 공간이다. 사회생활에서 느끼는 고충을 제대로 털어놓을 곳이 마땅치 않은 자들이 자유롭게 뒷담화를 풀어놓는 공간인 대나무 숲이 퇴사 압력을 받는 임신한 여자변호사, 제대로 노동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새내기 변호사 같은 법조계의 ‘을’들에게도 필요한 세상이 온 것은 아닐까.

최근 현직 여검사가 ‘검찰의 자정능력 발휘’를 촉구하는 글을 검찰 내부망에 올렸다고 한다. 그 검사는 “국민의 신뢰를 찾지 못하는 한 외부의 검찰 흔들기는 계속될 것이 자명하다”면서 “더 늦기 전에 내부로 눈을 돌려 원인을 찾고 해결하려는 자정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밝혔다. 언론에 소개된 몇 줄만 보더라도 그의 글은 검사라는 직업에 대한 사명감과 검찰 조직에 대한 애정이 그대로 배어있고 흐트러진 문구 없이 당당하고 맑았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녀의 소신과 용기에 박수를 보내는 것은 이 정도 수위의 발언에도 용기가 필요한 검찰의 폐쇄적 의사소통 구조를 잘 알기 때문이다.

그동안 검찰 내부에서 자성의 목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던 걸로 기억을 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같이 옷을 벗으면서 쓴소리를 토해냈던 것 같다.

2009년 광우병 보도를 했던 MBC PD수첩 제작진에 대한 기소결정에 항의하는 부장검사의 사의표명, 2011년 검찰이 불신받는 현실을 개탄하며 사표를 내던졌던 대구의 어느 검사가 그러했다.

그것을 보면서 그 정도의 의견제시나 토론도 허용되지 않은 곳인가라는 의문이 들었고, 그들이 검찰 조직 속에 머물면서 진정한 소통과 양심의 실현을 위해 노력해 주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도 느꼈었다.

다시 신라 경문왕 설화를 이야기하자면, 경문왕은 대나무 숲에서 울려나오는 소리가 싫어 대나무 숲을 모조리 베어버리고 산수유 나무를 심게 했다고 한다. 신라 역사를 연구하는 분들은 “신라는 숲을 살렸을 때 나라도 살았고, 숲을 죽였을 때에 나라도 죽었다”고 한다.

대선을 앞두고 어느 후보 할 것 없이 검찰 개혁과 사법개혁이 주요 의제다. 그 어느 때보다 법조인들 스스로 내지르는 대나무 숲 외침소리가 절실히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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