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우연히 신문에서 그녀를 보았다. 유명한 모 연극의 주연배우였던 그녀가 새로운 작품을 준비하고 있으며 심기일전하고자 개명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환하게 웃는 그녀의 사진을 보며 나는 그녀를 처음 만났던 그날을, 지금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던 그녀를 회상했다.

2년 전 어느 추웠던 겨울이었다. 점심식사 후 약간 나른하고 조용했던 언론중재위원회 사무실에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다급하고 흐느끼는 목소리로 다짜고짜, 인터넷에 자신의 누드 사진이 돌아다니고 있으니 제발 내려달란다. 아니 대체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란 말인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시종일관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지만 일단은 사무실로 한번 방문해보시라는 말로 통화를 마무리 지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까지도 장난전화일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정말로 그녀가 나타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정확하게 약속한 시간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칭칭 싸매어 두 눈만 내놓은 모습으로 내가 근무하는 언론중재위를 방문했다. 사연을 들어본즉 여배우의 노출을 내세워 꽤 흥행을 거둔 유명 연극의 여주인공으로, 연극 홍보용 누드 사진을 수차례 촬영했단다. 하지만 도저히 노출로 인한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도중하차했는데, 그 후에도 각종 매체가 앞다투어 이제는 주연도 아닌 그녀의 누드 사진을 싣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저런, 세상에나! 나도 한번 연극 제목으로 검색해보니, 민망할 정도로 높은 수위의 누드들이 버젓이 실려있다. 노출 때문에 도중하차했던 사람에게 잔인하다 싶을 정도였으니, 그녀가 왜 그렇게 다급하게 흐느끼며 전화했는지 그제서야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법적으로 사진을 당장 삭제할 수 있는 길은 없었다. 법원에 가처분 신청을 하자니 시일이 오래 걸릴 것이고, 정보통신망법상의 유해정보라고 보기에도 어려웠다. 남은 방법은 초상권 침해를 이유로 언론중재위원회에 조정을 신청한 다음, 심리단계 혹은 그 전 단계에서 기사를 삭제해주는 내용으로 언론사와 합의하는 것이었다. 조금 돌아가는 방법이긴 하지만 잘만 되면 신속하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었고, 이렇게 설명하자 그녀는 한번 해보겠다며 의지를 보였다.

그로부터 며칠은 그야말로 누드와의 전쟁이었다. 그녀와 함께 앉아 각종 인터넷 언론의 사진들을 비교해보며 “이 벗은 몸이 정녕 너의 벗은 몸이냐”는 다소 민망한 질문을 수십번 주고 받은 끝에 대략 60건 정도의 사진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 지리한 작업을 하는 동안 그녀는 내게 그간의 고충을 털어놓았다. 지상파 드라마에 출연시켜주겠다는 조건으로 연극에 출연했으나 결국 무산된 이야기와 자신이 누드의 주인공임을 알아볼까봐 낮에는 밖에 나오지도 못한다는 사연. 여기저기 사진을 내려달라고 사정해보았지만 자기들 소관업무가 아니라는 답변뿐이었고 절망한 나머지 자살까지 생각했었으며, 정말 이제는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언론중재위원회의 문을 두드렸다고…. 그 심정을 왜 모르랴. 나라면 못내놓아 안달일 그 예쁜 얼굴을 싸매어 가리고 다니는 걸 보니 얼마나 세상을 무서워하는지 한눈에 느껴졌다.

결과는 해피엔딩. 모든 언론사가 조정신청을 취하하는 조건으로 당장 사진을 내려주었다. 취하서를 내기 위해 다시 한번 우리 위원회를 방문한 그녀는 한결 밝아진 모습이었고, 내 손을 연신 잡으며 고맙다는 말을 반복했다. 꼭 사례를 하고 싶다는 말에 내가 한사코 사양하자 준비해온 조그만 핸드크림을 내 전화기 뒤에 몰래 숨겨놓고 가는 기민함을 보이기도 했다.

2년 뒤에 다시 기사에서 만난 그녀는 그때처럼 얼굴을 가리지 않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기사에는 어려울 때 언론중재위원회에서 도움을 받았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로서는 꽤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잊지 않고 기억해주는 그녀의 마음이 참 감사하고 뭉클했다.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건 딱 한걸음이라고 한다. 딱 한걸음만 내딛으면 그 다음에는 계속 내딛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지만 그 한걸음이 죽도록 어려운 법이라고. 어쩌면 그녀에게는 언론중재위원회가, 그리고 내가 첫 한걸음이었는지 모르겠다. 부디 앞으로 그녀가 걸어가게 될 두걸음, 세걸음이 탄탄하고 밝기를, 그녀의 다소 특별한 팬으로서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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