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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20주년 맞는 다산인권센터 설립, 자랑스러워요”다산인권센터 설립자 김칠준 변호사
대한변협신문  |  news@koreanbar.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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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호] 승인 2012.11.05  16: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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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보다 인권운동가라는 호칭이 더 익숙한 김칠준 변호사(52·사시 29회)를 만나기 위해 수원지법 앞 사무실을 찾았다. 그가 만든 ‘다산인권센터’가 지난달 27일 20주년을 맞았다. 그의 변호사 사무실 한켠에 마련했던 ‘인권상담소’가 이제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인권단체로 성장했으니 소회가 남다를 터였다.
“시작은 미약했어요. 당시만 해도 시대적 분위기가 주황색 노조조끼 입은 분들이 변호사 사무실 들락거리는 것조차 부담스러울 때였어요. 변호사실 한켠에 ‘인권상담소’라고 차리고 드나드는 문도 달리하고 그랬죠. 사실 저의 인권운동의 실무적인 뒷받침이 필요해 만들어졌는데 어느 순간 분리 독립해 독자적 생존력을 갖춘 인권단체가 됐어요.”
다산인권센터는 ‘인권에는 양보가 없다’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가장 유명하고 가장 전투적인 인권단체로 성장했다. 수원지법 앞의 ‘법무법인 다산’에서 나와 2007년 수원 매교동 시내에 둥지를 틀고 경제적으로 독립성을 강화해가고 있다. 인권침해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간다는 다산인권센터는 경기도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억울한 용의자의 누명을 벗겨주는가 하면 노숙소녀의 사망사건 용의자로 몰렸던 청소년들을 도왔다. 장애인복지시설의 악습을 세상에 알린 평택 에바다 사건에도 깊이 관여했다. 가정폭력에 못 이겨 남편을 살해한 여성들의 사건에서 가정폭력의 책임은 가정폭력을 폭력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우리사회의 잘못된 통념과 제도에 있다는 것을 알리고 가정폭력특별법이 제정되도록 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어떻게 인권운동변호사의 길을 가게 되었는지를 묻는 말에 “자연스러운 결론이었어요. 학생운동을 한 건 아니었는데 사법연수원에서 친구를 따라 ‘노동법학회’에 들어갔어요. 일본판례를 통해 이론공부를 하고 파업현장을 찾아가 조사하는, 연수원에서 가장 역동적인 학회였어요. 노동운동을 측면지원하는 변호사가 돼야겠다 결심하게 됐습니다. 연수생시절, YMCA시민중계실 자원봉사를 하면서 서민들에게는 문턱이 낮은 변호사, 재야시민운동을 하는 변호사가 돼야겠다고 구상했고 1990년에 제가 사무실 내고 1년 후에 동기 김동균 변호사를 초청, 합류했습니다. 왜 수원이냐고요? 처음엔 노동자들이 밀집해있는 안산이나 안양, 평택을 놓고 고민하다 경기남부의 지법 앞인 수원을 고르게 됐어요. 2~3년 하다 보니 노동·공안사건을 드러내놓고 하자 싶어 사무실내에 ‘인권상담소’를 차린 것이죠.”
다산인권상담소 개소식은 한겨레신문 1992년 8월 30일자에 소개됐다. ‘인권변호사’ 김칠준·김동균씨 인권상담소 열었다. “소외된 사람들에 문턱 낮춰… 정당한 법적권리 회복 최선” 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됐다.
그 기사는 “이미 각종 시국사건에서 성실하고 정직한 변론으로 변호의뢰 당사자와 가족들은 물론 이곳 법조계로부터도 공신력을 쌓아온 김칠준, 김동균 변호사는 특히 피의자 조사과정에서 수사기관의 고문 등 가혹행위 추방운동에 앞장서왔다”고 소개하고 있다. 경기도 최초의 인권변호사로서 공안시국사건을 주로 맡아온 김 변호사는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시민운동에도 관심이 많다. 수원시와 삼성전자의 주최로 열린 ‘통일한마당’의 집행위원장을 맡고 의사회, 약사회와 함께 ‘노인주간 공동사업’도 벌인다.
“20명 이상 모이면 어디든 간다”를 모토로 노인정이건 향교이건 생활법률강좌에도 열심이다. 그렇게 지역사회에 든든히 뿌리박는 밀착형 변호사다. 그는 돈을 벌고 ‘다산인권센터’는 그걸로 인권침해 피해자를 돕는 분리형이 아니라 돈을 벌고 쓰고 활동하는 것을 다 함께 하려고 한다. 적게 받을지언정 선임료를 받고 일한다. 그 원칙은 사업과 활동이 분리되는 경향이 생겨나며 흔들리고 다산인권센터도 이젠 그의 품을 떠나 독립적 인권단체로 성장해가고 있다. 예전에는 법무법인 다산이 수임한 사건의 80% 가까이가 노동공안사건이었는데 요사이는 5%대 정도다. 그만큼 변했다. 법무법인 다산의 구성원은 대개 노동법학회출신들로 같은 생각을 하고 헌신할 준비가 된 변호사들이다.
그는 국가를 상대로 개인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활동도 정말 열심히 했다. 김 변호사는 화성연쇄살인사건 혐의자로 구속 수사 받던 사람을 위해 변론, 무혐의 결정을 이끌어내거나 무죄판결을 받아내기도 했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은 영화화되기도 했고 지금까지도 여진이 계속되고 있다. 미국에 거주하던 교포가 꿈속에서 김OO가 진범이라는 계시를 받았다며 경찰에 제보했고 느닷없이 서대문경찰서에서 김씨를 연행, 일주일을 가혹 수사한 끝에 자백을 받아냈다. 김 변호사는 그를 변호하며 가혹수사를 밝혀내 김씨가 석방되도록 했고 서대문경찰서,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도 제기해 승소했다. 그 와중에 김씨는 고문 후유증, 우울증으로 자살, 비극으로 마무리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김칠준 변호사가 2009년 인권위원회 사무총장을 퇴직한 직후, 김씨의 아들이 찾아왔다. 자살로까지 몰았던 원 제보자가 인터넷 포털에다 카페를 만들고 소설도 써 “김씨가 화성연쇄살인범인데 그 사실이 드러날까 두려워 가족들이 독살했다”는 주장을 펴고 있었던 것.
소설책은 판매금지가처분을, 그 사람을 상대로는 손해배상과 위자료소송, 형사고소까지 냈다. 최근 손해배상을 인정받았다. 타인에 대한 이유 없는 증오로 자신의 존재이유를 찾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을 전해 듣는 기분이다.
인권운동을 20년 넘게 해온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터. 가장 어려운 점이 뭐냐고 묻자 “과거에는 사회경제적으로 어렵고 탄압도 심했지만 그만큼 열의와 지지, 성원이 충만했었어요. 민주화가 됐어도 경제사회적 약자는 여전히 많고 과제는 많아졌는데 헌신하고자 하는 사람은 줄었고 참여를 끌어내기도 너무 어려워요. 냉소만 느껴지죠. 노동자를 위한 행사에 기부를 받기 위해 변호사사무실을 돌아다니면 예전에는 정말 자신이 할 일을 대신해주고 있다는 고마움, 죄책감에 성의껏 기부해주었어요. 그런데 요사이는….”
그렇다. 악이 무엇인지 분명하고 흉측한, 나와 다른 괴물이라 여길 때는 함께 힘을 합쳐 싸울 수 있었다. 그러나 요즈음 내 안의 모습에서 악을 느끼고 악인지 선인지 내 안에서 구분이 무너질 때 그 싸움은 정말 더 어렵고 힘들어진다. 이제 그런 시대가 된 것이다.
그가 20주년을 맞은 다산인권센터에 썼다는 편지를 읽어보았다. “그 사람은 저로 인해 태어났지만 이렇게 자란 것은 스스로의 힘이었습니다. 아니 인권의 동지들과 지역의 모든 시민사회단체 활동가, 이웃들의 관심과 사랑의 힘이었습니다. 아니 그 사람을 이렇게 멋진 성년으로 키워준 것은 역설적으로 그 사람에게 줄기차게 던져진 인권의 과제였습니다. …중략… 스무살의 ‘그 사람’을 정말 축하합니다. 스무살의 ‘그 사람’이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하필이면 고교에 입학할 무렵,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집안형편이 어려워졌어요. 검정고시로 대학을 들어가기 전에 형님이 하시던 청계천 피복공장에서 일을 도왔어요. 피복노동자들이 어떻게 사는지 일찍 알게 된 거죠. 그때 가난한 변호사가 되어야겠다고 막연히 결심했었어요.”
1998년 1년 동안 안식년을 가졌을 때 김 변호사는 서울 참여연대에서 자원활동을 했다. 부당하게 권리를 침해당하고 있는 시민들을 위해 ‘작은권리찾기운동본부’를 발족했고, 아파트 공동체운동을 지향하며 ‘아파트공동체연구소’를 만들었다. 김 변호사는 아파트 주민들을 상대로 하는 아파트시민학교를 통해 아파트공동체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 수원지방변호사회 이사로 재직하면서는 중소기업법률구조단을 구성해 운영했다. 이를 계기로 법무법인 다산에서 중소기업법률센터를 만들고 기업을 대상으로 법률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2007년부터 2009년까지 약 3년간 국가인권위원회 사무총장으로서 사회적 약자의 인권보호와 인권증진을 위해 헌신하기도 했다.
이제 그가 곳곳에 뿌린 씨앗들이 무성한 숲으로 자라나고 있다. ‘다산인권센터’도 그렇지만 그가 설립한 ‘다산인권재단’은 ‘인권재단 사람’으로 이름을 바꾸어 서울에서 인권센터 건립기금 마련작업을 하고 있다. 그는 앞으로의 20년도 인권운동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묵묵히 옳다고 생각한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이 주는 든든한 무게감을 느끼며 인터뷰를 마무리하고 서울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 박신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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