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의 소개로 최근 읽게 된 책이 있다, 제목은 ‘백수생활 백서’. 나온 지 꽤 되었고 그리 유명한 책도 아닌지라 별 기대없이 읽었는데, 상당히 흥미로웠다.
주인공은 백수다. 그것도 자발적 백수. 평소에는 아버지집에 얹혀살면서 최소한의 소비로 살아간다. 그러다 돈이 궁해질 때는 주유소, 편의점, 비디오가게 등 머리를 쓰지 않고 육체적으로도 그리 어렵지 않은 단순노동 아르바이트로 필요한 자금을 조달한다. 그리고는 아무런 미련없이 다시 백수생활로 돌아간다.
20대 후반인 그녀가 백수생활을 하고 있는 이유는 딱 한 가지. 책 읽는 것이 너무 좋아서다. 그저 책을 읽는 것이 삶의 목적이고 의미다. 책 중에서도 소설책만을 읽기 때문에 실용적인 독서와는 거리가 멀다. 말 그대로 순수문학을 통해 순수한 재미를 추구한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위해 그렇게 아등바등 사는지, 왜 그렇게 많은 돈을 원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궁상맞다 싶을 만큼 검소하게 살면서 아르바이트로 번 돈은 모두 책을 사는데 쓴다. 책을 너무 많이 읽어 가끔 허무함을 느끼면서도 그 허무의 맛을 즐기는 경지에 이르렀다.
다소 황당한 스토리지만 흥미로운 것은 이런 부류의 인간들이 주변에 꽤 많다는 사실이다.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한 친구는 수업시간마다 교과서 밑에 책을 숨겨놓고 읽는 아이었다. 장르 불문, 작가 불문하고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던 그 친구는 하루에 평균 두세권의 책을 읽어 나갔다. 그가 읽지 않는 책이라고는 교과서밖에 없었다. 아이들 대부분이 조는 지루한 과목 시간에도 그 친구만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교과서 밑 소설의 세계에 흠뻑 빠져 있었다. 남들이 죽어라 시험공부에 매달릴 때도 그는 태평하게 수필집을 들고 있었다. 결국 국문과에 들어간 그는 출판사에 취직하여 그렇게 좋아하는 책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사실 나도 비슷한 부류의 인간이다. 살면서 정말로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은 대체로 책을 보고 있을 때다. 다른 건 다 포기하고 책만 읽으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다. 업무나 시험과 상관없는, 현실과 동떨어진 주제를 읽고 있을 때 특히 그렇다. 어떤 때는 스토리가 좋고, 때로는 운치가 좋고, 가끔은 활자 자체가 좋다.
대학교 3학년 겨울방학, 썰렁한 기숙사에서 폐인처럼 책에 파묻혔던 때가 대학시절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기억된다. 식당에 가는 것도 귀찮아서 햇반과 봉지김치로 끼니를 때우고 하얗게 밤을 새워가며 소설책을 읽었다. 꼬르륵 소리의 아우성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를 때까지 배를 주리며 밤마다 잠을 설쳐 몰골은 처량하기 그지 없었지만, 하루종일 방에 틀어박혀 오로지 책에 파묻혀 있는 것에서 희열을 느꼈다. 문장 하나하나를 잘근잘근 씹으며, 언어의 감칠맛을 느끼며, 평생 그렇게 책만 먹고 살아도 행복할 것 같았다. 사법시험이고 뭐고 월급 적고 시간 많은 직장에 취직할까 생각했다.
나는 비록 ‘백수생활 백서’의 주인공처럼 공식적으로 책 읽는 백수가 되지는 못했지만, 마음만은 여전히 책 읽는 백수로 살고 싶다. 책을 읽을 수 있다면 그까짓 소장쯤이 대수겠는가 생각하면 밀린 일이 후딱 해치워진다. 지방 재판이 있는 날은 아침부터 기분이 좋다. 오가면서 자투리 시간에 그만큼 책을 볼 수 있으니까. 재판이 끝나고 법원 근처 테이크아웃 커피점에서 커피를 기다리며 책을 펼칠 때, 뜬금없이 ‘변호사라서 정말 행복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 꿈은 앞으로도 백수처럼 띄엄띄엄 사는 것이다. 그 사이사이를 많은 책들로 촘촘히 메꾸어 가면서 말이다.
 

저작권자 © 법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