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사무실로 낯선 이름을 단 누런 봉투 하나가 등기로 배달되었다.

그 안에는 부산 근교의 고등학교 교사라는 자기소개와 제자를 통해 내 이름을 들었다며 사건검토를 청하는 내용의 편지가 서류들과 함께 들어 있었다.

그는 1970년대 중후반에 부산에서 대학교를 다녔는데 그 시절 여느 대학생들처럼 친구들과 학교 앞 다방에서 차를 마시다 무심코 정치 이야기도 하곤 하였다. 그렇다고 그가 비밀지하조직을 결성할 정도였거나 데모의 선두에 나설 만큼의 투사였던 것은 전혀 아니었다. 그냥 평범한 사범대 학생이었을 뿐이다. 대학 졸업 후 고등학교 교사로 발령받아 1년 남짓 근무하다 군에 입대한 그는 전혀 예기치 않게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대학시절 친구들과 했던 발언 때문이었는데 과연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던 시절이었다.

그와 그의 친구는 보안사로 끌려가 무자비하게 폭행을 당했고 대화의 전후 맥락이 모두 무시된 채 무조건 북한을 찬양하고 정부를 비방했노라고 자백해야 했다. 결국 반공법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그는 학교에서 파면을 당했고 그의 친구는 정신병을 얻어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오랜 시련의 세월이 지나 그는 그나마 국민의 정부 때 특별복직 대상이 되어 학교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여전히 반공법 위반자라는 낙인과 호봉산정이나 연금 상에서의 각종 불이익을 안고 살아와야 했다.

그러던 중 긴급조치위반으로 해직된 교사에게 해직기간 동안의 경력을 모두 인정해 주는 판결이 선고되었다는 기사를 보자 그는 자신의 경우도 불이익을 구제받을 수 있을지 물어 온 것이었다.

긴급조치 위반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재심판결이 있어서 민사소송도 수월하게 갈 수 있는 반면에 그의 경우는 이와 달랐다. 선결문제인 반공법 위반 사건에 재심을 청구할 사유가 난감하였다. 그가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의 억울함을 구제받기 위해서 좀 더 일찍 움직였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안타까움이 남았다.

지난 참여정부는 2005년 5월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을 제정하고 위원회를 구성해 은폐되고 왜곡되어 있던 과거사를 바로잡는 작업에 착수한 바 있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묻혀 있던 항일독립투쟁과 해외동포사를 발굴하고, 해방 이후 권위주의 통치체제 하에서의 불법적인 민간인 집단희생사건들과 인권침해사건들을 조사해 진실규명 하였다.

해방 이후 혼란한 정국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좌우의 극심한 대립 속에 무고한 양민들이 억울하게 희생되었던 비극의 역사, 군사정권 시절에 자행되었던 인권유린과 탄압의 끔찍하고 암울한 역사가 어둠 속에 묻혀 있다 환한 빛 아래로 제 모습을 드러내었다. 대구 10월사건, 여순사건, 국민보도연맹사건, 전국형무소재소자 사건, 부역혐의민간인희생사건, 진보당 조봉암 사건, 인민혁명당 사건, 간첩조작 사건, 고문치사 사건 등이 재조명되고 역사가 다시 쓰였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성과는 사법부가 피해자들의 재심신청을 받아들여 종전의 판결을 뒤엎고 무죄를 선고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이같은 재심사건의 무죄판결은 종전의 유죄판결로 인해 입은 불이익과 피해를 만회할 수 있는 토대가 되어 피해자들의 억울함을 뒤늦게나마 풀어주었다.

하지만 첫 조사를 착수한 때로부터 4년간의 존속기간을 부여받고 출범했던 진실화해위원회는 MB정부가 그 기간 연장에 대한 의지를 보이지 않아 결국 여러 가지 미완의 과제를 남긴 채로 2010년 12월 31일 문을 닫았다.

그가 좀 더 일찍 움직였으면 좋았을 걸 하는 내 안타까움은 그와 같이 아직 가슴속 멍에를 벗지 못한 채 살고 있는 이 땅의 다른 많은 피해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다행하게도 대선후보들이 저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못다 한 과제들을 해결하겠노라고 과거사정리에 대한 약속들을 하고 있어 희망이 보이는 듯하다. ‘과거의 잘못에서 배우지 않는 사람은 다시 그 잘못을 반복하게 된다’ 하였다. 정말 진정성 있는 대통령이 당선되어 투철한 소명의식으로 우리 역사의 진실을 규명하고 피해자들의 상처를 어루만져줌으로써 진정한 화해를 일궈내 주길 기대한다. 
 

저작권자 © 법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