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옹호 위해 싸워온 법조계 산증인

지난 15일은 대한변협 법조원로특별위원회 상무위원회가 열린 날이다. 법조계의 어르신들이 모인다는 소식을 접하고 원로들은 현 법조와 변호사 업계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듣기 위해 법조원로특위 위원장 류택형 변호사(84·고시 5회)를 만났다.

햇살이 환하게 들어오는 류 변호사의 서초동 사무실을 찾아가니 류 변호사는 95세의 변호사와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100세가 넘은 회원도 있다고 전했다. 원로법조회는 65세 이상 변호사들을 회원으로 하고 있으며 전국에 1000여명의 회원이 있다.
“회장은 저고요, 부회장은 이석선(서울), 강신영(광주), 강해룡(서울) 변호사입니다. 여기에 상무위원이 10명, 자문위원이 10명이지요. 곽명덕 대한변협 협회장이 임기를 마치면서 만들었으니 벌써 30년도 더 됐네요. 법조원로회라는 이름으로 모임을 갖다가 2010년에 변협 내 특위가 된 거지요. 법조 원로로서 어떤 부분에 기여할 수 있는가 논의하는 자리입니다. 원래 저와 이사묵 선배, 용태영 등 세 사람이 주축이었다가 몇 년 전부터 제가 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80세까지 할 수 있도록 한 공증인법을 고쳐 원래대로 원로들이 계속할 수 있도록 건의하고 사법연수원, 로스쿨 및 젊은 판검사, 변호사들에게 선비정신을 가르칠 원로들의 강의 개설 등을 연구하고 있어요. 또 대법원장과 검찰총장을 만나 ‘법조일원화’가 제대로 되도록 요구할 작정이에요. 변호사를 거친 판검사가 고위직에서 활약할 때 사법민주화, 사법정의실현, 검찰의 정치적 중립실현이 가능하다고 봐요.”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법조원로회의 업무를 설명했다. 요사이 젊은 변호사들이 너무나 경제적 가치에 경도된 현실을 안타까워하면서 인권옹호와 사회정의 실현, 그리고 사법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법조선배들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었다.
서슬 퍼렇던 유신시절, “유신은 헌법정신에 위배된다”며 시국사범에 무죄를 선고해 파면당한 후 갖은 고초를 당한 이영구 변호사, 김재규 사건에서 소수의견을 냈다가 안기부 서빙고동 분실로 끌려가 대법원 판사 사직서를 쓴 양병호 변호사, 2번이나 옥고를 치르며 독재에 항거한 이병린 변호사, 고문사례집을 발간했던 조영래 변호사 등등….
“안중근 의사도 항소를 포기했지만 항소기간은 준수한 다음 사형을 당했어요. 그런데 인혁당 사건은 간첩조작으로 형식적인 판결을 한 다음날 사형을 시켰어요. 그때 협조했던 법조인들, 정말 반성해야 합니다. 그런 법조인들이 있는가 하면 압력에 굴하지 않고 정의를 지켜낸 지조 있는 분들도 참 많았어요. 변호사 오래한 분들은 잘 살지 않느냐고요? 일부가 그렇죠. 그런 분들, 빌딩 가진 분들은 원로법조회에 안 나와요. 그런 분들이 경제적으로 고통받는 원로들을 도우면 좀 좋아요? 근데 안 그래요.”
부산지방변호사회는 생활이 어려운 원로변호사들에서 50만~100만원씩 매월 지급하고 있다. 그런 사업이 다른 회에도 좀 퍼졌으면 하고 바란다. 홀로 병상에 누워있는 회원들도 많다고 했다. 법조원로회는 그런 분들의 병문안과 장례시 유족이 원할 경우 법조원로장으로 치러준다.
“며칠 전 검찰총장이 모교인 고려대에서 강연하려다 취소됐다는 기사를 봤어요. 기소독점주의는 제고돼야 합니다. 표적수사나 하고 정치권 눈치나 보니 그 꼴을 당하지 않습니까? 검찰이 왜 그 모양이 됐는지 저도 검찰 출신이지만 안타깝습니다. 예리한 칼도 요리사가 쓰면 좋은 요리 만드는 데 쓰이지만, 강도가 들면 뭐가 됩니까? 법조인이 투철한 봉사정신으로 사법정의 실현에 매달려야죠. 경제에만 신경 쓰다 이렇게 된 겁니다.”

류택형 변호사는 율곡사상과 떼놓을 수 없다. 40년 전 일이다. 서울 서대문구 홍파동에 있던 홍파강당과 율곡선생 사당이 철거될 위기에 처했다. 이 상황을 전해 듣고 평소 율곡사상에 심취해있던 류 변호사는 이병린 당시 변협 협회장과 10여명의 변호사들의 힘을 모아 철거 저지를 위한 무료 변론활동을 벌였다. 결국 사당은 철거됐고, 율곡선생의 신주를 임시로 모실 주택을 두 차례나 구하는 등 옮겨다니다가 결국 1969년에 사재를 털어 율곡로에 ‘율곡회관’을 마련했다.
이 율곡문화원의 초대원장을 맡아, ‘아태평화공론’ ‘율곡정론’ ‘아세아공론’ ‘율곡공론신문’ 등을 발간했으며, 율곡문화상을 제정하는 등 율곡의 사상을 알리는 일에 평생을 바쳐왔다. 국제학술강연회도 연다.
진주 류씨인 류 변호사는 종친들 모임에 갔다가 ‘영남학파인 퇴계를 연구해야지 왜 기호학파인 율곡 연구에 평생을 바치고 있느냐’는 핀잔을 들었다. 그럴 때마다 을사사화에 연루되었던 선조 류인숙(柳仁淑)의 죄가 율곡의 상소로 벗게 됐다는 사실과 율곡이 퇴계를 가장 큰 스승으로 여겼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면 수긍을 하더라는 것.
율곡은 퇴계가 ‘文純公’이라는 시호를 받게 힘썼으며, 을사사화에 휩쓸린 퇴계를 위해 42차례나 상소를 올려 퇴계를 구했다. 잘못된 재판을 준렬히 꾸짖은 율곡은 유명한 법률가이며 시대에 맞게 법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변법(變法)주의자’였다. 즉 악법도 법이 아니라 자연법을 기본으로 두고 실정법은 다양한 변주가 필요하다는 주장으로 이상과 현실의 조화를 중시하는 사상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사무실에는 윤보선 선생이 썼다는 ‘理通氣局’이라는 액자가 걸려있다. 율곡은 理와 氣가 통하며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의 사상은 조화와 균형을 중시하며 대동평화사상을 체계화했다. 율곡은 성리학, 양명학, 실학 등 다양한 학문을 두루 섭렵한 후 새로운 차원으로 집대성해 ‘성학집요’를 내놓았다. 그의 사상 성학집요는 요순시대의 구현이며 선진복지국가 구현 사상이다. 의지할 데 없는 고아, 홀아비, 과부는 국가와 사회가 돌보아야 하며 과부의 재가는 허락돼야 하고 문을 열고 살아도 아무 걱정이 없는 大同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몇 년 전 법조원로 200여명이 김일성 대학을 나온 중국대사의 강연을 들은 일이 있었다. “현재 중국은 공산주의를 향하는 게 아니다. 요순시대의 대동평화사상을 구현하는, 손문의 삼민주의 구현의 길을 향하는 게 아닌가”라고 질문했더니 깜짝 놀라며 “어떻게 그리 잘 아시느냐”고 반문하길래 “조선의 율곡 선생이 바로 대동평화사상의 구현자”라고 설명해 주었다고.
한국 중국 일본이 서로 싸우고 영토 문제로 아귀다툼을 벌일 것이 아니라 서로 양보하고 돕는 아시아공동체로 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중국 옌볜대에는 율곡철학센터가 있으며 상하이 푸단대에는 율곡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교수가 대동평화사상을 가르치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싸움박질만 하다보면 뒤떨어져요. 한중일은 문화의 보편성을 가지고 있어요. 안중근 의사도 인류의 대동평화 실현을 원했어요. 안중근은 율곡이 살았던 황해도 해주 석담 사람이에요.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죠. 안창호도 해주 사람이고요. EU를 보면 뭉쳐서 평화를 이뤄내야 한다는 걸 알 수 있잖아요?”
류택형 변호사는 격동의 시대를 살아낸 산 증인이기도 하다. 제5회 고시 사법과를 수석으로 합격하고 검사생활을 하다 육군본부 군법회의 수석검찰관을 할 무렵이었다.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장성들이 의견 차이로 소요를 일으켜 군법회의에 회부됐다.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김형욱이 ‘내란죄’로 기소해 달라는 의견을 전해왔다. 당시 류 검찰관은 김형욱에게 내란죄로 기소했다가는 무죄로 석방될수도 있다, 그러니 벌금형이라도 가능한 소요죄로 기소하자고 설득했다. 결국 장성 전원이 벌금형으로 석방됐다.
이 일이 있은 후 박정희 대통령은 같은 사법, 행정 양과 합격 후배인 장덕진 문화체육부 장관을 보내 그에게 공화당 성북지구당 위원장 자리를 제의해 왔다. 하지만 그는 “박정희는 위에서 내리누르는 逆의 정치를 하고 있다”고 거절했으며, 이후 세번이나 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그는 윤보선 전 대통령, 장준하, 김대중, 함석헌, 신현돈, 함세웅, 황산덕 등 시대의 영웅들의 변론을 맡았으며, 대한변협 인권위원장을 4년 연임하면서 최초로 ‘인권보고서’를 만들었다. 그때 집필을 조영래 변호사가 맡았다.
1987년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이 발생하자 부산 변호사들이 시위하다가 구속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노무현, 문재인도 포함돼 있었다. “당장 부산으로 내려가 영장전담 판사와 담판을 지었지요. 지금 인권보고서를 집필 중인데 이러한 중대한 인권침해 사태를 좌시하지 않겠다고요. 얼마 후에 변호사들을 석방시켰어요. 노무현 변호사가 제 사무실에 찾아와 인사를 합디다. ‘선배님이 정보부에 끌려 다니시며 고초를 겪으신 걸 알고 있다, 저도 선배의 길을 따를 각오가 되어 있다’면서 ‘이번엔 정말 감사하지만 다음엔 그냥 구속되도록 놔두시라’고 결연한 표정으로 얘기하는 것을 보면서 ‘야, 이 사람 대단하다’ 싶더군요. 결기가 느껴지고 배포가 있는 사람이었어요. 김정일을 만나서도 중국도 개혁의 길을 가는데 북한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지적한 사람이에요. 법률가는 대개가 소심한데 그 분은 달랐어요.”
류 변호사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변론한 인연으로 공직을 여러 번 제의 받았으나 전부 거절했다. 그런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며 잘못하면 언제든 비판할 자유를 갖고 싶어서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이 ‘율곡정론’에 율곡의 개혁정신에 대한 논문을 내준 일에 고마움을 가지고 있으며 “정치·경제 사상가로서 탁월하신 분이 아닌가”라고 말했다.
사재를 아낌없이 털어 율곡사상 전파에 힘썼던 류 변호사는 변호사 단체가 성금이 모자란다는 말이 들리면 지체 없이 나섰다. 대한변협 인권재단에도 제일 먼저 나서 성금을 희사했고 서울지방변호사회 창립 100주년에 법조인 30여명에게 수여한 율곡인권상, 율곡법률문화상 기금도 자신의 사재를 턴 것이었다. 이렇듯 변호사로 번 돈을 모두 사회를 위해 희사해 제48회 법의날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안타까운 점은 이러한 업적이 잘 알려지지 않았고 논문이나 저술이 거의 한문으로 쓰여져 있어서 청년 변호사들이 잘 읽지 않는다는 점이다. 법조원로들이 청년변호사와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지점이다.
“먹고 사는 거, 경제적인 거에 너무 매몰되지 않았으면 해요. 어려운 때일수록 원칙으로 돌아가라고 말하고 싶어요. 법치주의 실현, 경제민주화 실현, 인권옹호 이런 것들이 변호사의 사명입니다. 한문공부도 좀 해서 퇴계·율곡의 한국철학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후배들이 알았으면 좋겠고요.”
궁극의 지혜는 통하는 것인지 그는 율곡의 제자이면서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예수의 가르침이나 율곡의 가르침이나 이웃사랑의 실현, 부모에 대한 공경 등 많은 부분이 통한다고 설명해주었다.
 

/ 박신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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