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들의 꿈과 진로를 경작하는 농부입니다”

대한민국 학부모들이 믿는 신화 ‘행복은 성적순’이 진리라면 이 사람이 가장 행복해야 하는 게 아닐까? 전교 수석을 한번쯤 해본 사람들의 집합인 법조계에서야 그 말이 진리가 아님을 알지만, 그 말의 배경이 되는 ‘노력의 힘’에 대해서는 대개 수긍을 한다. 그런 면에서 사법시험 최연소합격, 행시 수석, 외무고시 차석, 서울대 법대 수석 졸업을 한 고승덕 변호사에 대해서도 그런 의미의 경탄을 하는 것 같다.

고 변호사는 삼시합격에 그치지 않고 40대 중반에는 펀드매니저 시험에 합격해 금융전문가로 이름을 날렸고 50대 초반에는 정치에 입문했다. 최근에는 ‘드림 파머스(Dream Farmers)’라는 단체를 설립해 청소년들이 꿈꾸고 성공하도록 돕는 사회운동을 하고 있다.

그의 끝없는 도전 스토리를 듣기 위해 지난 5일 서울중앙지법 동문 앞의 사무실을 찾았다.

“변호사 일은 하시는 겁니까?”
“거의 하지 않습니다. 일반 송무사건은 하실 변호사들도 많으신데 굳이 제가 끼지 않아도 될 것 같고요, 사모펀드 투자손실사건 같은 건을 몇 건 하고 있는 정도입니다. 형사사건은 안 맡는 걸 원칙으로 합니다. 10년간 한 건 했는데 우리 교회 장로님이 형편이 어려워 무료변론 해드렸어요. 행정소송을 주로 하고 시청, 구청 고문을 많이 맡았었는데요 다 사직했습니다. 시간을 벌려고요.”

변호사들이 좋아할 소식인 것 같다. 그가 이렇게 시간을 확보하려 애쓰는 이유는 중앙대 박사과정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7~8년 전부터 ‘청소년 나비운동본부’를 만들어 청소년 사회운동을 해왔는데 좀 더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싶어져서 청소년학과에 진학했다. 2007년 법인화하면서 ‘드림파머스’로 명칭을 정하고 꿈을 짓는 농부라는 뜻을 분명히 했다. 드림파머스에서는 ‘드림아카데미’라는 교육기관에서 해마다 200명 정도를 교육하고 있다. 20년 넘게 공부해온 법학과는 다르게 교육, 복지, 공교육, 사회, 문화까지 체계적으로 공부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세상공부하는 기분이라고 전하는 고 변호사는 양성평등의 문제도 다시 생각하게 됐다고 전했다.

“경쟁이 치열해졌다고 지레 포기하는 청소년들이 많아요. 기회가 더 많아진 것인데 말입니다. 많은 분야가 새로 생겨나고요. 무기력한 청소년들이 꿈꾸게 하고 싶어서 드림파머스를 시작했어요. 인생을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서요.”

그는 드림아카데미 운영 말고도 초·중·고·대학교 특강활동도 열심히 한다. 강연료에 구애받지 않는다. 청소년들이 꿈을 가지고 노력할 동력을 만드는 일이라면 당연히 돈과 관련 없이 해야 한다고. 드림파머스는 공교육이 할 수 없는 부분을 메우는 일을 하려고 한다. 토론, 대화, 말하기 교육 프로그램 개발과 방과 후 학교, 주말학교 운영프로그램 개발에 열심이다.

“시대가 달라졌어요. 50년 전만 해도 중고등학교 진학이 당연한 일이 아니었잖아요. 10대 중반이면 몸은 성인과 별 차이가 없는데 판단능력, 사회화는 많이 떨어져요. 사회와 동떨어진 삶을 살다 막상 사회에 나가면 적응을 못 하는 거죠. 그 단절을 극복할 수 있도록 봉사활동이라든가 사회체험이 필요합니다. 그런 역할을 해내는 단체로 키워나가려고요.”

삼시합격의 이력은 그를 강연장으로 끌어냈고 사람들은 자녀들의 롤모델로 삼고 싶어한다. 자연스럽게 강연을 통해 청소년들을 대하게 됐고 그들의 멘토로서의 책임감을 느꼈을 법하다. 그가 청소년을 돕는 사회운동에 나서게 된 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수순인 듯.

사람들이 찾아와 그의 공부비법을 묻는 경우가 많고 그가 고시공부할 때 시간을 아끼기 위해 먹었다는 비빔밥 이야기는 누구나 아는 이야기가 돼버렸다. 핵심은 노력인데 방에다 가둬놓고 비빔밥을 넣어주면 공부를 잘 할 것으로 기대하는 어처구니없는 경우를 많이 전해 듣는단다.

그에 대한 오해는 또 하나, 천재일 거라는 추측이다. 그는 천재라는 말을 싫어한다. 시내버스도 다니지 않는 동네에서 중학교를 다녔고 서울로 올라와 ‘촌놈’이라고 무시당하기도 했다. 집안형편 때문에 사교육을 받지 못했고 한때 성적이 부진해 바보 소리를 듣기도 했다. 고교 1학년 때는 성적이 반에서 중간에 들기도 힘들었고 2학년때는 60명이 넘는 과밀학급에서 뒤에서 4등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노력했다.

그는 사는 방법을 A-B-C-D로 구분한다.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실패할 운명(Drop)으로 가고, 시키는 것만 겨우 하면 보통사람(Common)으로 살게 되고, 시키는 일을 남보다 더 잘하려고 애쓰면 나은 인생(Better)을 살게 되고,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하면 가장 우수한 존재(Ace)로 인정받는다는 것이다. 그의 이런 A-B-C-D 인생론이 그의 책 ‘고승덕의 ABCD 성공법’의 핵심이다. 그렇게 시키지 않아도 열심히 선택하고 공부해 에이스가 되었다.

“변호사로선 어떠셨어요?”
“삼시패스한 후에 대학을 졸업했어요. 1980년도였고 12기로 사법연수원을 수료했죠. 제 기수에서 대법관이 세명인가 나왔어요. 당시의 시대상황이 판·검사로서 국가의 일을 하는 게 버겁게 느껴져 미국 유학을 떠났어요. 전관으로서 우대받으며 돈 벌 수 있는 걸 포기하고 청바지입고 햄버거 먹으며 원 없이 공부하고 왔죠. 세 군데 로스쿨을 다니고 석사학위를 네개 받았습니다. 1992년에 변호사로 출발하니 힘들더군요. 한 2~3년 먹고살기가 힘들었어요. 그래서 열심히 정신없이 일했고요. 그러다보니 회의가 들더군요. 일을 하다 죽어야 하나? 내 꿈은 뭘까 싶다가 한 10년쯤 하니 참을 수 없는 지루함이 느껴졌고 그게 주식을 하게 된 계기예요. 자산 형성하고 난 후에 의미 있는 일을 찾고 싶어서. 1년에 소송을 250건 이상을 하다 보니 스케줄을 내가 정할 수 있는 생활을 해야겠다 싶었던 거죠.”

그가 펀드매니저 시험에 합격하고 증권전문가로 알려지자 주변에선 이단아 취급을 했다. 점잖지 못하다는 비아냥도 들려왔고 너무 세속적이라는 말도 들었다. 그러나 2004년, 재테크열풍이 불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고 변호사는 쓰는 만큼이 내 돈이라고 생각한다. 잘 벌었으면 잘 쓰는 것이 좋은 일이고 당당하고 바람직하게 쓰는 것을 좋아한다.

“장기불황 조짐이 완연합니다. 부동산도 불안하고 추가하강 조짐도 있어요. 그러나 주식시장은 우리나라가 상대적으로 강합니다. 해외펀드들 이것저것 다 열풍이 불었지만 결국 실패로 귀결됐죠.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나라가 한국입니다. 경제전망도 좋은 편이고요. 외국 분산투자가 좋은 거라 막연히 생각하지만 글로벌화돼서 연동됩니다. 아, 물론 하강국면 지속은 맞습니다. 유동성 거품이 빠지는 중이니까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유럽이 호황을 맞았다가 일본으로 중국으로 옮겨왔고 현재로선 전 세계적 공급과잉입니다. 중국에서 3개의 철강회사가 문을 닫았습니다. 철강은 산업의 기본소재 아닙니까? 거대한 조정국면의 임계점을 맞고 있죠. 그렇다고 당장 주식, 펀드를 팔아치우라는 건 말이 안 되고요, 위험을 피하는 게 성공인 만큼 안전자산 쪽으로 이동해야죠. 저위험 저수익으로 방향을 틀라고 충고합니다.”

과연 전문가다운 설명이었다. 쉽고 빠르게 상황을 설명해주고 대안까지 제시해준다. 그는 주식강의책을 3권이나 냈다. 그의 주식강의는 명쾌한 해설로 인기가 높다.

그렇게 다방면으로 재능을 과시하는 그에게 변호사라는 직업의 의미를 물었다.
“제게 정말 잘 맞는 직업이고 기본적인 것을 해결해준 직업입니다. 사회적 대우, 공신력도 무시못할 요인이죠. 제가 방송에 나가고 주식전문가로 인정받고 하는 모든 것들의 기반에는 변호사라는 것이 뒷받침되어준 것입니다. 정말 좋은 직업이죠. 그러나 하다보면 회의가 들고 힘들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후배들에게 한 10년은 인생 전부를 걸고 해보라고 말해줘요. 너무 성급하게 자기에게 맞지 않는다며 다른 길을 찾는 경우는 안타까워요. 인생은 나무를 키우듯 길게 봐야합니다. 어제 씨 뿌려놓고 오늘 열매 맺는 걸 기대하면 안 되잖아요. 세상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노력하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는 몇 번이고 ‘노력’이라는 말을 했다. 그의 키워드는 노력인 것 같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적당히 나름대로 하는 노력이 아니라 고통스럽고 시간을 들이는 노력이다. 인생은 생각하고 노력하는 대로 된다고 믿는다.

“다들 일을 덜하고 같은 효과가 나기를 기대하는 거 같아요. 최소한도를 추구하는 거죠. 한번 읽으면 외운다고요? 남들 3번 읽으면 외울 때 저는 10번 읽어야 해요. 어떻게 더 노력하고 어떻게 더 일할까 궁리해야죠. 인생은 노력입니다. 사소한 차이가 큰 차이를 낳습니다. 물론 공부가 성공과 등치어는 아닙니다. 그러나 재미없는 것도 열심히 할 수 있어야죠. 재미있는 건 얼마나 더 잘하겠습니까? 힘드니까 다른 걸 선택한다고요? 무엇을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닌데요.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 거죠. 수동적인 공부는 절대로 성공할 수 없습니다. 노력한 후에 실패한다 해도 성공을 이룰 베이스가 돼줍니다. 노력은 결코 배신하지 않아요.”

그는 고교 2학년 때 첫 시험에서 낙제점수를 받았다. 그때부터 공부를 따라잡기 위한 마라톤에 들어갔다. 여름방학 내내 땀띠가 나고 진물이 나도록 공부했다. 가을에 친 시험에선 상위권이 됐다. 여섯 달만이었다. 고 변호사는 그때를 인생의 가장 극적인 전환점이라고 회상했다. 아무리 남보다 뒤떨어졌어도 여섯 달 노력하면 인생이 반전된다는 것을 체험했다는 것.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바로 연수원에 들어갈 수도 있었고 판사를 그만둔 후에도 바로 개업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그는 굳이 변호사의 길을 택했을까.

“시대상황이 어둡고 괴로운 시기였습니다. 대학 졸업 후 짧은 봄이 왔어요. 얼음과 눈이 내 힘이 아니어도 녹는다는 생각도 들었죠. 그러나 잠깐이었고 1982년 전두환 정권이 한창일 때 판사가 됐어요. 현실 참여 대신 저는 공부를 택했어요. 민주화운동을 한 친구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전관예우를 포기하고 7년간 유학생활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법관으로 평생 살 거였으면 후회할 일이겠죠.”

그는 늘 변화한다. 하다못해 컴퓨터 바탕화면, 폴더배열도 오래 계속 사용하는 법이 없다. 더 편리하게, 더 보기 좋게 시도해본다. 명함을 직접 디자인하고 주기적으로 명함을 수정해서 조금씩 더 나은 것으로 버전업한다. 그런 시도의 연장선상일까? 그는 정치에 입문했다가 18대 총선에서 공천을 받지 못하고 변호사로 돌아왔다.

“4년간 봉사했고 공천 탈락은 위로받는 기분입니다. 아직은 정치현실이 갈 길이 멀다는 느낌입니다. 막연히 생각하는 정치와 몸으로 부딪히는 정치는 다릅니다.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분립이 이상적이라는데 국회가 행정부를 견제 못해요. 상임위원회 밑에 소위원회들이 세분화돼 있고 하나라도 맡아 주체적으로 일할 수 있게 해줘야 합니다. 청문회, 공청회, 국정감사가 실질적으로 역할을 해내지 못합니다. 보스중심의 현 정치는 바람직한 정당, 정치의 모습이 아니죠. 정치에 참여하고 싶은 후배변호사에게 하고 싶은 말이요? 국회의원으로 스타처럼 입성할 생각보다는 다양한 정치경험을 쌓으라고 해 주고싶어요. 국회의원만 정치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시민단체에서 정치 이슈별로 목소리를 내는 것도 정치이고요. 오래 고민하고 연구한 대안들을 내고 여론화한다면 정치권이 당연히 콜할 수밖에 없고요. 기본기가 없는 상태에서의 정치는 성공하기 힘듭니다. 변호사가 얼마나 좋습니까? 정치 그만둬도 먹고살 길이 있잖아요? 사회적 책임의식을 가지고 꾸준히 현실참여활동을 해야 합니다. 제가 시도했고 주장했던 것들, 2~3년 전에 제안했던 것들이 지금 실현되고 있어요. 고교 무상교육, 군의문사 국립묘지 안장, 전사자 통지시의 예우, 대학내 음주 원칙적 금지 등이 그겁니다. 정치는 시대가 원하고 국민이 원할 때 봉사할 마음의 준비가 된 개인이 맞아야 합니다. 제 것을 모두 버리고 내려놓은 후 희생하고 봉사하는 것이 정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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