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9회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김기덕의 ‘피에타’가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김기덕 본인뿐만 아니라 그간 한국 영화계가 갖고 있던 무언의 열등감을 상당부분 치유해줬다는 의미에서 축하할 일이다. 많은 발전을 이룩한 한국 영화계에 대한 수상으로 읽힐 수도 있겠지만 ‘피에타’는 작품 그 자체로도 마땅히 수상할 만한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피에타는 이탈리아어로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을 담고 있는데, ‘십자가에서 내린 그리스도의 시체를 무릎 위에 놓고 애도하는 마리아’를 표현한 그림이나 조각상을 말하기도 한다. 특별히 미켈란젤로의 조각 작품이 유명하다.

이 영화를 살피기 전 미리 한 가지, 김기덕 영화가 잔혹하다는 비판에 대해 첨언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는 “나는 항상 사회의 온도와 사회가 가진 느낌에서 영감을 얻는다”(인터넷 한국일보, 2012년 9월 11일)는 말을 했다. 우리 사회의 온도는 과연 몇 도나 될까? 통계청은 2011년 하루 평균 43.6명의 자살자가 발생했다고 기록했다. 이 냉혹한 세상에 비하면 김기덕의 영상은 오히려 턱없이 순화됐다고 볼 수도 있다. 어쨌거나 ‘외면하고 싶은 현실’, 그 영상이 우리를 불편하게 할 뿐이다.

자본은 사랑을 느낄 수 있는가?

영화 속 강도는 천애 고아다. 그는 사랑을 모른다. 상가 건물 교회를 마주하고 있는 골방 속 몽환적 자위가 그가 아는 사랑의 전부다. 그는 조직에 고용돼 문자 그대로 채무자들의 고혈을 빨며 살아간다. 인간 강도를 자본으로 등치시키면 이해가 더 쉽다. 강도, 즉 자본이 지나간 자리는 언제나 인간의 선혈이 낭자하다. 이 참담한 현실 속에서 궁금한 게 있다. 그의 무자비함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명자(채무자): “개 쓰레기 새끼! 너…, 이 새끼 천벌을 받을 거야!”
강도: “남의 돈 신 나게 쓰고 ‘설마 어쩌겠어’하는 니들이 쓰레기지.”

극적 상황을 이론적 형식으로 약간 바꾸자면, 마르크스는 자본이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을 악이 선을 착취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그것은 ‘대립하는 동등한 권리, 즉 노동력을 사용하는 구매자의 권리 대 유일한 재산인 노동력을 파괴당하지 않으려는 판매자의 권리라는 이율배반’이었다. 자본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물질적 힘이다. 그저 모두를 ‘가해자=피해자’로 만들며 무자비하게 세상을 지배하고 있을 뿐이다.

어느 날, 강도에게 느닷없이 ‘엄마’라는 여자가 찾아온다. 강도는 처음엔 믿지 않는다. 그녀에게 자신의 살을 베어 먹이고, 근친상간도 서슴지 않는다. 즉 자신의 핏빛 황금 조각을 떼어 먹이고 능욕함으로써 ‘자본’은 자신이 부정했던 관계가 ‘사랑’에 의해 다시 부정되는 것을 거부한다. 엄마는 강도가 날마다 저주의 칼을 던지던 다트판 위 암울한 ‘마돈나’ 그림을 묘한 미소를 머금은 자신의 사진으로 바꾼다. 강도에게도 인정하기 싫은 감정의 변화가 찾아온다.

사실 영화는 불가능한 출구를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과연 자본이 사랑을 느낄 수 있을까? 아니, 사랑을 느끼는 자본, 인간적인 자본, 구원받은 자본을 자본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그 형용모순적 세상이 과연 실현가능한가? 그 모순이 지양된다면 그것은 어떤 세상일까? 그 실현이 아득할수록 소망은 더욱 절실해진다. 설령 그 길이 보이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한 걸음씩이라도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사랑의 결핍을 통해 사랑을 느끼는 자본

어느 날, 그 여자가 사라진다. 그리고 그 여자가 사라졌을 때 강도는 사랑의 결핍을 느낀다. 그는 사랑의 결핍을 통해 그제야 사랑을 느낀다. 그리고 사랑을 느낀 강도는 이제 강도가 아니다. 그는 조직에서 내쫓기고 엄마를 찾아 나선다. 그는 그에게 당한 피해자들이 자신의 엄마에게 복수할 것을 두려워한다. 이제 상황이 역전됐다.

강도는 피해자들을 의심하며 확인하러 다니다 다시 명자 부부를 만난다. 불구가 된 명자 남편에게 몇만원을 내밀기까지 하며 값싼 동정심을 베푼다. 하지만 그 정도로 용서받을 리 없다. 명자가 소주병을 깨들고 증오의 말을 내뱉는다.
“법만 없다면 너 같은 새끼…, 당장 죽이고 싶어!”

묻지 않을 수 없다. 법은 누구의 편인가? 법은 명자의 편이 아니라 강도를 보호하는 힘이다. 사적 복수는 금지되고 국가는 그 사적 복수의 힘을 모두 모아 독점하며 강도의 편에 서있다. 법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강도가 아니라 명자다. 자본주의 역사 이래 노동보다 자본이 더 법을 두려워한 적은 없다. 그래도 법을 포기할 순 없다. 누구의 필요에 의한 것이든, 법이 있어 더한 착취를 막아주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는 반전이 있다. ‘엄마’는 강도의 엄마가 아닌 강도에게 희생당한 한 젊은이의 엄마였다. 그녀가 강도에게 접근한 것은 강도에게 사랑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자신을 희생해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심정이 어떤 것인지를 강도에게 느끼게 하고 싶어서였다. 그녀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처절한 복수였다.

그녀는 폐건물 위에 올라가 강도의 피해자에게 복수를 당하는 것처럼 꾸며, 강도가 밑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떨어질 심산이었다. 그런데 모든 것이 완벽한 바로 그 결정적 순간, 그녀와 강도의 마음이 모두 갈등한다.

강도: “엄마를 살려주세요! 대신 내가 죽을게요!”
여자: “어서 칼 내려! 강도야! 안 돼. 그러면 안 돼!”

강도는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자기희생적 사랑을 느끼고, 여자는 예기치 않게 원수에 대한 사랑을 느낀다. 이 전복적 갈등이 우리의 잔혹한 삶을 전복시킬 희망이 될 수 있을까? 여자는 갈등하는 자신의 마음을 안고 강도 앞에 떨어졌다. 그렇게 가해자는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는 가해자가 됐다.

구원은 어디에 있는가?

이 영화는 종교적 구원의 갈망으로 읽힐 소지도 있다. 은유적인 제목 때문에 더욱 그렇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우리는 ‘사랑 혹은 자비’의 종교적 시현을 느낄 수 없다. 번잡한 상가 건물 속 교회는 스스로의 번영만을 꿈꾸는 듯하며, 세상과 단절된 절 속 승려는 불구가 된 채 바깥세상이 얼마나 험한지 상상조차 못하는 듯하다. 영화는 종교적 구원을 맹목적으로 갈망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구원의 근원이 왜 종교인지를 묻고 있다.

강도는 엄마가 자신이 죽으면 묻어달라던 소나무 아래 땅을 판다. 그때 한 젊은이의 사체가 나온다. 아들인 자신을 위해 짜고 있는 것으로 알았던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강도는 그녀가 자신의 엄마가 아니라 희생자의 엄마라는 사실을 알고 경악한다. 그는 속죄하고 싶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값싼 동정심이 아닌 온몸을 희생하는 속죄였다.

강도의 죽음을 집행할 사람은 그를 가장 증오했던 명자였다. 동트기 전 새벽, 강도는 그녀의 비닐하우스 앞에 놓여있는 낡은 트럭 아래로 들어가 체인으로 두 다리를 칭칭 묶고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그는 엄마라고 믿었던 여인이 자신의 죽은 아들에게 입혔던 스웨터를 입고 있다. 그는 사랑하는 그녀의 아들로서 속죄하고 싶었다.

명자가 비닐하우스에서 나와 트럭에 시동을 건다. 울퉁불퉁한 공터를 벗어나 한적한 새벽길을 달린다. 영화의 끝 장면은 소름끼치도록 잔인한 서정을 보여준다. 트럭이 달리는 어슴푸레한 도로 위에는 널따랗고 검붉은 핏자국이 하염없이 이어진다. 구원의 묵시록이다.

이 영화가 특별하다면 계급적 적대감으로 자본의 잔혹함을 직접 타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강도는 흡혈로 이뤄진 자신의 피를 그렇게 희생자들에게 되돌려줬다. 그가 속죄하고자 한 이유는 사랑 때문이었다. 구원은 사랑에 있었다. 그것이 비록 지금 당장은 출구 없는 소망으로 읽힐지라도, 여자든 강도든, 노동이든 자본이든, 사랑의 결핍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모두가 느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구원의 희망은 있는 셈이다. 이렇게… 영화만큼 잔혹한 삶을 극복하며 일궈낸 김기덕의 결실에 찬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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