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이 재미있는 이유는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다른 책으로 읽힌다는 것이다.
‘성심구지 수부중 불원의(誠心求之 雖不中 不遠矣)’
중용(中庸)에 나오는 이 글귀는 내가 20대 후반엔 수첩 겉장에 써놓고 매일 들여다보며 경구로 삼았던 말이다. ‘나는 과연 나의 목표를 향해, 그 중앙을 향해 얼마나 똑바로 날아가고 있는가? 진심으로 구하고 노력하면 꼭 中을 꿰뚫어버리지는 못했을지언정 중심과 멀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 멀어지지만 않아도 어디냐’ 다짐했던 말이다. 나는 꼭 일이관지(一以貫之) 하리라.
지금 40대가 되어서 읽는 경구의 핵심은 中에 있지 않았다. 오히려 성심(誠心)의 성(誠)이라는 글자에 붙잡힌다. 한의원을 열고서 환자를 만나면서 매일같이 한결같이, 진심을 다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새삼 느낀다. 성심이라는 거 생각보다 쉽지 않다.
몇 해 전 가을 한동안 슬럼프에 빠진 적이 있었다. 지금에 와서 고백하건대 나에게 슬럼프는 남들과의 비교에서 시작되었다. 학회에서 소위 잘나가는 동료들을 만나고서 ‘학교 다닐 땐 내 노트를 빌려가던 애였는데 이제 나보다 좋은 차에 좋은 병원에 큰소리 치고 다니네. 아마도 운이 좋은 녀석이군’ 하고 실컷 폄하를 해놓고서는 기껏 한의원으로 돌아와 좌절하기 시작했다. ‘내가 뭐가 모자라단 말인가? 내 치료방법은 효율이 떨어지는 걸까? 아니면 환자를 대하는 태도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이렇게 생각이 꼬리를 물다보니 환자를 만나는 것이 더욱 힘들고 싫어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남도 믿게 할 수 없다. 나도 내 능력에 대해서 회의하고 있는데 환자가 나를 믿어줄 리가 없지 않은가.
시간이 흐르고 솔직히 유치하고 부끄럽지만 그때 그것은 부러움과 질투라는 것을 인정하고서 나는 깊은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한의학에서는 오장육부가 인간의 감정들 즉 칠정(七情)과 관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간심비폐신(肝心脾肺腎)이라는 생물학적 장기들이 칠정이라 불리는 노희사비우경공(怒喜思悲憂驚恐)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정서를 그것도 일상적이고 구체적일 수 있는 감정들을 주관하고 나아가 조절한다는 것이 언뜻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거칠게라도 오장이 주관하는 감정과 그것이 결여 혹은 과잉되었을 때 나타나는 신체증상을 나열해 본다면 이렇다.
화가 치받아오를 때는 간의 기운을 쓰는 것이다. 간이 연약한 사람은 부질없이 착하기만 하여 화를 못 내게 되고 간기가 뭉치는 증상들 흔히들 말하는 ‘화병’이 나타난다. 심장에서는 기쁨과 희열을 주관하니 지나친 기쁨은 심장을 힘들게 한다. 비장에서는 생각을 주관한다. 비위가 좋은 사람은 아이디어가 많고 친화력이 강하나 그렇지 못하면 소화불량이나 신경성 위염과 같은 증상에 시달린다. 폐장에서는 슬픔과 근심을 주관하는데 슬픔에 민감하면 폐와 부부장기인 대장의 조섭(調攝)을 망쳐서 과민성 대장증상과 같은 병에 걸리기 쉽다. 신장에서는 공포와 불안을 주관하는데 신장의 기운이 병약한 사람은 작은 두려움 앞에서도 쉽게 흔들리게 된다. 요사이의 불안장애들이 두드러지는 이유는 한의학적으로는 신장기능이 약해졌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다.
몸과 마음이 다른 곳에 있지 아니하고 같은 기운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오장을 조절해서 감정을 제어하고 반대로 감정을 가지고 신체적인 리듬을 되살리는 것이 가능해진다.
가을이 되면 생각이 깊어지고 우수에 젖는 사람이 많아진다. 가을의 기운은 만물을 하강시키기도 하거니와 이런 하강의 기운이 인간의 구체적인 상황에 맞닿을 땐 슬픔의 감정으로 나타난다. 金기운이란 낙엽과도 같이 아래로 향하는 기운이며 슬픔은 타인의 고통에 공명하는 감정이다.
이 가을 金기운을 받아서인지 결단을 내리는 분들이 많아졌다. 그분들 모두 진정한 슬픔을 아는 분이길, 스스로 생각하는 중심을 향해서 성심껏 날아가길, 그 중심에 칠정에 흔들리면서도 다시 일어서는 민생들이 있기를 바란다.

 

저작권자 © 법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