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친구 중에 좀 특이한 녀석이 있다. 법대를 다니면서도 철학과 수업을 더 많이 들었고, 고시합격보다 철학과로 대학원 진학하길 더 원했으나, 가정 형편상 철학을 접고 지금은 공무원으로 살고 있다. 근데 이 친구가 얼마 전부터 독일어와 불어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서른도 한참 넘은 나이에 업무상 필요하지도 않은 외국어를 새삼 시작하는 이유를 묻자, 그는 20대에 경제적으로 자립하기 위해서 노력했고 그것이 어느 정도 안정되었으니 이제는 자신의 꿈-하버마스를 독일어로 읽고, 들뢰즈를 불어로 이해하는 것-을 위해 외국어를 공부한다고 했다.
나는 지금 시작해서 언제 그 어려운 책들을 원서로 읽을 것이냐, 그건 지적 허영이다, 그 시간에 직장에서 인정받기 위해 더 노력하고 업무에 도움되는 공부나 하라고 잔소리를 했다. 거북이 같은 그는 어차피 하루 이틀이 아니라 10년, 20년을 두고 하는 공부이니 성급할 것이 없고, 이제껏 ‘해야 하는 것’만 해왔으니, 이제는 ‘하고 싶은 것’을 하겠다고 하며, 당장 필요해서 하는 게 아니라 좋아서 하는 것이니 ‘허영’이라기보다는 ‘사치’라고 했다. 이제는 스스로에게 ‘필요’가 아니라 ‘사치’를 선물해주고 싶다고 했다.
‘사치’의 사전적 의미는 필요 이상의 돈이나 물건을 쓰거나 분수에 지나친 생활을 하는 것이다. 부정적 어감이다. 보통 사람들은 명품 가방과 옷, 보석, 외제승용차 등을 떠올린다.
‘사치’에서 부정적 느낌을 지우고 ‘멋’을 더하면, 아마 ‘운치’가 되지 않나 싶다. 거북이 친구는 ‘사치’라고 표현했지만, 그에게 하버마스와 들뢰즈는 ‘사치’라기보다는 ‘운치’다. 어느 정도 안정과 독립을 이룬 다음, 그것을 위해서 일단 접어두었던 꿈을 좇는 것, 그것이 누구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고 남의 것을 뺏어 오는 것도 아니며 과한 욕심을 부리는 것도 아니라면, 그만한 운치가 또 있을까.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하나씩,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추구하는 것. 그 이상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선물도 없다.
하루하루 먹고 사는 일이 쉽지만은 않은 시절이지만, 먹고 사는 일에만 매몰되면 삶이 맛이 없어진다. 필요한 일만 하고 사는 삶은 싱겁다. 필요하지 않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고, 또 그것을 할 수 있는 용기와 이제껏 살아온 삶에 대한 작은 일탈은 삶에 양념이 된다. 크고 거창할 필요가 없다. 거북이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앞에서는 타박을 했지만, 일탈 없이 공부와 일만 하며 살아온 내가 뭔가 잊고 있는 게 없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나도 작은 ‘사치’, 아니 ‘운치’를 부려보기로 했다. 업무와 무관한 철학서 한권을 샀다. 사실 평생 공부만 해 온 법조인에게 가장 훌륭하고, 안전한 ‘운치’가 독서다. 그러나 업무로 바쁜 변호사에게 업무와 상관없는 책을 읽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나 역시 최근 몇 년간 법률 서적, 경영·경제 관련 서적 외에는 별로 읽어본 기억이 없다. 필요한 책만 읽어온 것이다. 왕년의 문학소녀에게는 씁쓸한 일이다. 그래서였는지 그동안 삶이 닭가슴살처럼 팍팍한 느낌이었고, 뭔지 모를 불만족스러움이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독서에도 급이 있어서, 필요한 책만 보는 것은 하수요, 좋아하는 책을 보는 것은 중수요, 운치 있게 보는 것이 고수다. 옛날 선생님들 말씀이 사서(四書)를 보더라도, 여름에는 맹자를 보고 겨울에는 논어를 보라고 했다. 한여름 더위는 義를 중시하는 맹자의 칼칼함으로 잊고, 한겨울의 추위는 仁을 이야기한 공자의 따뜻함으로 잊는다는 것이다. 멋도 보통 멋이 아니고, 운치도 보통 운치가 아니다. 이 정도가 되어야 독서의 고수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여러 번의 태풍이 오가는 사이 어느덧 가을이 완연하다. 가을이 도망치기 전, 독서의 고수를 꿈꾸며 방금 산 책을 급히 편다. 올가을 작고 소소한 일탈을 권유한다. 멋있고, 운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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