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잘 나가는 법조인이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좋은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일찍 합격하였으며, 검사발령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항상 먹구름이 가득했다. 홀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옛날 하숙집 딸하고 억지로 결혼하자 고부간의 전쟁이 시작됐다. 이건 시도 때도 없는 전쟁이었다. 또 전투의 당사자인 고부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 주된 희생자가 되어 숨이 옥죄어 옴을 느꼈다.
살벌한 전투현장에서 삶의 진액이 소진되어 헉헉거렸다.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는 의문은 가슴에 덩어리를 지우며 눌러앉았다.
그런 그가 사주팔자를 풀이하는 이론체계-고상하게 말하여 명리학-에 이끌렸다. 삶의 모순에 대한 희미한 해답이라도 찾을 요량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자신과 모 그리고 처의 사주팔자를 분석하니, 그 속에서 고부간의 전쟁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한 깨달음을 얻었다. 아! 이것이 운명이라면 조용히 받아들이자. 그후부터 그의 마음에는 평화가 찾아들었다. 고부간의 전쟁은 계속되었어도 그가 이 전쟁에서 터지는 폭탄에 피 흘리는 일은 더 이상 없게 되었다.
얼마 전부터 명리학을 배운 내 이야기를 섞어보자. 주로 아이들에게 앞으로 적절한 어드바이스를 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 이를 배웠다. 그런데 나 역시 놀라운 사고의 전환을 하는 포인트를 여기에서 잡을 수 있었다.
과거부터 어느 곳에 있건 입바른 소리를 무척 잘했다. 나는 이것이 내 투철한 정의감의 발로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초등학교 시절부터 엄청난 난독을 통해 수립한 내 지식체계가 적절한 진단을 한 결과로 여겼다. 다시 말해서 그런 것이 남들보다 우수한 가치관과 능력의 소산이라는 자부심에 절어있었다.
그런데 맙소사! 그게 아니었다. 사주팔자는 전혀 다른 시각을 제시하였다. 내가 그런 소리를 즐겨 하게 된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단순한 내 기질 탓이었다. 사주팔자가 그러니 때와 장소도 잘 구별하지 못하고 그런 말을 예사로 지껄였고, 경우에 따라서는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기도 했던 것이다. 이를 안 이후 사고와 행동의 큰 전환을 하기에 이르렀다. 어딜 가서건 가급적 뒷방 늙은이를 자처하며 말을 삼갔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려 애쓰고, 또 젊은 친구들이 용기와 자신감을 가지도록 칭찬과 격려의 말을 하는 쪽으로 노력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흔히 명리학이나 사주팔자에 거부감을 표시한다. 그 이유의 하나로, 정해진 운명이 있다면 우리가 애써 살아가는 것이 무의미해지지 않느냐고 한다. 그러나 두 가지 예에서 보았듯이 사주팔자를 파악함으로써 오히려 운명의 질곡을 상당부분 벗어나기도 한다.
우리 오래된 풍속에는 혼인할 때 사주단자를 보내는 것이 필수였다. 과거 사대부들은 교양의 하나로 명리학을 익혔던 듯하다.
이순신 장군은 성스런 인격자로 국가를 존망의 위기에서 구해내었다. 그런데 장군의 난중일기에는 자주 꿈을 꾸어 예지를 얻거나 점을 쳐 군사행동을 결정한 이야기가 나온다.
다산 선생의 글에도, 조선의 고을마다 자칭 타칭 주역의 전문가라라는 사람들이 ‘김(金)주역’ ‘이(李)주역’으로 통하며 행세했다고 한다. 이래 보면 사주팔자나 점은 우리 문화의 일부라고 할 수 있겠다.
주역이나 사주팔자 등 동양의 이론은 상대적인 세계관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이것에 의한 판단을 절대시하는 것은 심한 오류에 쉽게 빠져든다. 이를 잘 알면서도 또 아직 서투른 단계에 있음에도 곧잘 남의 사주를 봐준다. “언제 무렵이 참 안 좋았지요?”하고 사주명식을 들여다보고 물으면, 거의 그렇다고 한다. 그럴 때 “얼마나 힘들었어요?”하며 그의 입장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는 말을 해준다. 대부분 고개를 끄덕인다. 어떤 사람은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이런 상호교감과 신뢰의 상태에서 “언제부터는 좋아질 겁니다. 용기를 가지세요”하고 권유한다. 그 사람의 얼굴이 달덩이처럼 환하게 바뀐다. 어쩌면 이것은 요즘 말하는 ‘힐링’의 과정일지 모르겠다.
낡고 초라한 모습으로 바람 쪼개지는 언덕에 서 있는 나. 그런 내가, 가진 작은 힘으로 남을 위로하고 도울 수 있다니 그럭저럭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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