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청년변호사, 국제재판소·국제기구에 도전해야”

일본이 ICJ(국제사법재판소)에 독도영유권 문제를 제소하겠다고 나서 국제재판소에 대한 관심이 모아진 가운데 휴가차 귀국한 국제유고전범재판소 권오곤 재판관(59)을 만나 국제 사법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한국인 최초 유엔 산하 국제재판소 상임재판관이 된 지 11년째인 권 재판관은 “독도는 우리가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는 영토이므로 일본의 제소에 응할 필요가 없으며 우리가 응하지 않으면 효력이 없다”고 명쾌하게 설명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대응책을 만들어 둬야 할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일본이 제소하겠다고 나선 ICJ는 강제관할권이 없고 일본인 재판관이 한명 있다. 영토문제에 대해 전문가가 아니라고 사양했지만 계속되는 기자들의 질문에 성실히 답해주었다.
권오곤 재판관은 유고 내전(1992~1995) 당시 ‘인종 청소(25만명 사망)’를 자행한 혐의로 기소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전 유고 대통령 재판에 이어 1급 전범 라도반 카라지치 사건의 재판장을 맡고 있다. “카라지치에 대한 검찰 측 증거조사가 끝났어요. 그에 대한 11개 죄목 중 소위 인종 청소와 관련된 제노사이드(인종학살) 부분은 대량살인이긴 하나 인종말살로 보기에는 증거가 부족해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다만 스레브레니차와 관련된 제노사이드 혐의는 그대로 재판이 계속될 것입니다. 그래도 보스니아에선 반발이 커 제 사진을 놓고 화형식을 벌였다고 하더군요.”
1992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국민투표를 통해 유고슬라비아연방으로부터 독립을 결정하자, 보스니아-세르비아 의회는 이를 따르지 않고 사라예보를 수도로 하는 스르프스카 공화국을 창설하여 연방에 잔류했다. 카라지치는 스르프스카 공화국의 대통령에 취임하여 세르비아의 지원을 받아 내전을 주도했다.
보스니아 내전은 1992년부터 1995년까지 계속됐고, 이른바 ‘인종청소’라는 학살이 자행된 가운데 약 25만명이 사망하고 300만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했다. 특히 1995년 7월에는 유엔이 안전지대로 선포한 스레브레니차에서 8000명에 가까운 이슬람계 주민들이 일주일 만에 학살되었는데, 이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자행된 최악의 학살사건으로 불린다. 카라지치는 잔혹한 ‘인종청소’의 주범 가운데 한 사람으로 수배된 지 13년 만인 2008년 7월 21일 체포되었다. 권 재판관은 25만명을 학살한 혐의를 받은 밀로셰비치 유고슬라비아 대통령 재판에 이어 카라지치 사건의 재판장을 맡고 있다.
“사실 형사사법은 국가주권의 상징이잖아요? 국제사회가 한 나라의 국가 원수를 재판할 수 있는가, 국가원수는 정치적 책임을 질 뿐 형사처벌은 국가주권에 반한다는 논리로 일본이 천황의 전쟁책임을 비켜갔어요. 그런데 우리는 법정에 세워 책임을 묻는 재판을 진행해 선례를 만들었어요.”
전 세계가 충격을 받은 전쟁범죄에 유엔이 단죄하기 위해 만들어진 국제재판소이다 보니 재판관의 연임여부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사항이다. 권 재판관은 재판소가 만들어질 때 들어가 연임했다 2009년에 임기가 끝났지만 재판은 계속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재판을 마칠 때까지 1년 단위로 안보리에서 임기를 연장 중이다. 증인보호, 가석방, 재심 등 잔여업무처리를 위한 ‘잔여업무처리기구’가 내년 7월 시작할 것으로 보인다. 유고전범재판소는 161명을 기소해 130여명의 재판이 끝난 상태다.
대구고등법원 부장판사를 하다 국제재판소 재판관이 된 권 재판관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정말 형사소송법의 규칙들이 피와 땀으로 이루어낸 역사이기에 실제적으로 철저히 지켜진다는 것이다.
“범인 10명을 놓치더라도 1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면 안 된다는 법언이 있잖아요? 사실 우리가 ‘효율’을 위해 슬며시 무시하는 원칙들이 정말 다 지켜지더군요. 도도한 형사절차의 물결에 실제로 자기가 말려들어갔을 때 제대로 자기를 방어해낸다는 것이 쉽지 않은 거라 생각해요. 그러나 진술거부권이 존중받고 피고인의 경우도 진술을 거부하면 판사, 검사가 한마디도 물어볼 수가 없어요. 무죄추정의 원칙도 철저히 지켜지고요. 최근 저희 재판소에서도 피고인 7명에 대한 재판을 진행하는 가운데 검찰 수사단계에서 한명이 신문조서상 다른 피고인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있었는데 그 피고인이 증언거부자였어요. 그 피고인에 대해서는 반대신문을 할 수 없는 관계로, 그 신문조서 전체가 증거능력이 없는가를 두고 몇날며칠 격론을 벌였어요. 우리가 만들어낸 판례가 ICC 등 후세의 국제형사재판소의 선례가 될 것이니 신중하게 판단할 문제였죠.”
권 재판관이 국제재판소에서 일하는 의미로 가장 크게 꼽은 것은 ‘재미’였다.
“매일 매일이 새로워요. 선례가 없고 새로운 이슈에 따른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가며 재판을 하니까요. 영미법체계와 대륙법체계를 절충해가며 가장 적합한 형사사법제도는 무엇인가 고민하며 만들고 있어요. 제가 주장해서 한국제도를 도입한 것도 있고요. 다른 양 체제에 대해 배우는 것도 많습니다. 한국법조인은 양 제도를 절충해가며 재판해왔기 때문에 국제재판에 아주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한국법이 양 체제가 조화를 이룬 것이어서요.”
서울법대 수석 졸업과 사법시험, 사법연수원 수석이었던 권 재판관이 국제재판소에 가겠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많이 만류했었다. ‘남들 하는 대로’ 재판하며 살면 많은 것들이 보장되어있음에도 왜 굳이 언어장벽을 감수하며 미래도 불투명한 일에 도전하는가에 대한 우려였다.
처음에는 발음이니 문법이니 생각하며 되도록 조용히 있었다. 그러나 재판 과정이 30분 후 전 세계로 중계되는 상황에서 ‘왜 자신의 견해를 밝히지 않는가’라는 비판을 들었다고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완벽한 문장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견해임을 깨닫고 적극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재판관 호선으로 선출하는 부소장직에도 오를 수 있었다. 워낙 밝고 쾌활한 성격이라 적응도 빨랐던 것 같다.
“제가 판사 시절에 청와대 파견근무도 했었어요. 그 때 옆방에서 일하던 외교관 한분이 저더러 세계의 판사가 되라 하셨어요. 그때는 무슨 말이었는지도 몰랐는데 ICJ 판사가 되란 뜻이었어요. ICTY 재판관 소개책자에 ‘ICJ 판사와 동일한 대우’라고 되어 있어 웃었죠. 제 배석이었던 이동근 부장판사가 이메일로 헤이그의 이준 열사 기념관을 방문한 후, 우리도 헤이그의 국제재판관을 내어야 한다고 여행기를 보낸 것도 마음을 움직였어요.”
대부분이 말리던 재판관을 수락하고 헤이그로 떠난 배경을 웃으며 설명해주었다. 그런 것들이 다 운명이고 인연이 아닐까.
정창호 광주지법 부장판사가 캄보디아 크메르루주 전범재판소(ECCC) 재판관으로 갈지 여부를 고민할 때도 주저 없이 “꼭 가라”고 말해주었다. 정 판사가 속한 ECCC는 프랑스식 대륙법체계를 채택하고 있어 더욱 좋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구술심리, 직접주의에 의존하는 영미법제도로는 복잡다기한 국제 형사재판을 다루기에 적합하지 않아 ICTY에서도 대륙법체계를 많이 도입하고 있다는 설명.
좀 어려운 질문을 해보았다. 헌재와 대법원, 양 기관에서 엇갈리는 결정이 나와 요사이도 논란이 되고 있다고 말해주고 의견을 물었다.
“글쎄요. 양 기관이 겸양하면서 국민의 입장에서 더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가야겠지요. 5공화국 헌법을 만들며 ‘헌법재판’기능을 놓고 대법원 스스로가 정당해산권, 탄핵권 등이 부담스러우니 헌법재판소를 만들어 맡기라 했던 것도 사실이고요. 제가 헌법재판소의 연구부장을 할 때 대법원 판결에 대한 한정위헌 결정이 나와 마음고생을 했던 것도 기억이 새롭네요. 헌재가 많은 훌륭한 결정으로 국민의 신뢰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대법원의 하부기관화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 봅니다.”
권 재판관은 헌법재판소 연구부장, 대법원 재판연구관을 골고루 거친데다 일을 즐기는 성품으로 후배들이 많이 따랐다. 그를 처음만난 것은 서울중앙지법의 민사항소부장으로 있던 1999년이었다. 소액사건의 항소심이라 기삿거리도 거의 없고 기자가 방에 들르는 것도 귀찮아하던 시절인데도 성의를 다해 설명해주던 모습이 이채로웠다. 못 알아듣는 기자를 위해 화이트보드 위에 그려가며 사건을 설명해주면서 개요, 의의를 재미있게 설명해주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서민들의 소액사건 하나에도 정성을 다하고 대법원 판결을 따라 가기보다 새로운 시각으로 판례를 바꾸기 위해 도전하는 모습이 ‘보통 판사는 아니다’라고 느끼게 만들었었다. 경매로 아파트를 낙찰 받아 들어가 보면 전 주인이 밀린 아파트관리비 고지서가 기다리기 마련. 경매대금에 포함되어있지 않은 의외의 비용에 놀라 재판을 해보지만 예외 없이 내야하던 시절, 부당하다는 생각에 연구를 거듭해 공용부분에 대해서는 낙찰자가 내야 하지만 전 주인이 사용한 부분은 대신 내줄 필요가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의 판례변경을 이뤄낸 판결이 됐다.
이런 판결을 하던 권 부장판사는 수만명을 학살한 전쟁책임자를 재판하게 됐다.
“우리나라 사법부가 훌륭하다는 건 다 인정하는 사실인데 그것이 국민의 마음 속에 받아들여지기 위해선 좀 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최고의 인재들이 밤을 새워가며 노력해 판결한 것이니 믿어달라’는 걸로는 부족하지 않을까요? 국제재판을 해보니 기록을 애초에 두 가지 버전으로 만들더군요. 비실명처리해 일반에 공개하는 것과 실명그대로 표기해 재판부가 검토하는 것으로요. 재판의 전 과정은 생중계나 마찬가지로 공개돼요. 혹시 보호해야할 증인 실명이 나오는지 등을 검토한 다음 홈페이지로 중계되니까요. 대략 30분 후면 전 세계가 보는 셈이죠. 정의는 정의가 구현되는 모습이 보여 져야 하는 것이니까요.”
대한변협이 판결문공개를 계속 주장해온 것도 바로 그 이유다.
우리 법조계는 국제화에도 좀 더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권 재판관이 있는 ICTY만 해도 인구비례나 유엔 분담금 비율을 보더라도 1000명 직원 중에 한국인이 6명은 돼야 하지만 1명뿐이다. 일본이 ICJ 제소를 자신 있게 주장하는 것도 소장과 부소장을 포함해 15자리인 ICJ 재판관 중 3자리인 아시아 몫 재판관을 계속 배출해왔고 소장까지 배출한 바 있기 때문이다. 국제적 권위가 있는 국제법 교수들을 외무성 자문위원으로 확보하고 영토분쟁 전문가도 많다. 아무리 독도가 우리 땅이라 해도 국제사회, 국제재판에 적용되는 룰대로 말하지 못하면 힘들어진다는 것을 스포츠경기를 통해서도 느끼지 않았던가.
좀 더 많은 법조인이 국제재판소와 국제기구에 도전하고 진출해야 한다.
“여름에 3주, 겨울에 3주는 재판소 전체가 같이 쉬는 휴가이고 재판부별로 조정해 1주일의 휴가를 가져 1년 중 7주의 휴가를 씁니다. 처음엔 좋더니 점점 불평하는 대열에 합류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돼요. ICJ는 1년에 8주 휴가거든요. 7주나 되는 휴가를 친구들이 많이 부러워하더군요. 더군다나 재판을 몇 건 하느냐고 물어봐서 1건 가지고 몇 년째 하고 있다고 말하면 믿을 수 없어 합니다. 하하.”
그러나 이국에서 새로운 제도, 낯선 언어로 재판하는 것이 쉬울 수는 없을 터. 세 남매를 데리고 간 이국생활은 애초의 예정보다 길어졌고 중고생이던 자녀 중 큰딸은 결혼해 손녀를 안는 기쁨도 맛보았다. 둘째딸은 미국에서 일하고 있고, 막내아들은 최근 군입대를 위해 한국으로 돌아와 신체검사를 마쳤다. 미국에서 공부하는 자녀들 뒷바라지에 집사람이 몇 년 동안 ‘비행소녀’가 됐었다고 웃었다.
젊은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너무 즐거워 대학에서 강의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말은 퇴임 이후를 묻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대신했다. 그의 경력과 경험은 한국 법조계가 가진 자산이다. 선진적인 사법제도에 대한 그의 체험을 한국에서 더욱 발전시킬 수 있기를 기원하며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저작권자 © 법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