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러운 선배법조인 역사 기억해주길”

20일 열리는 변협 60주년 변호사대회에서는 법률문화상 시상식이 열린다. 법률문화 창달에 공이 많은 법조인을 선정해 기리는 법률문화상은 재야법조계의 가장 권위 있는 상이다.
60주년이라는 의미 있는 해에 수상자로 김이조 변호사(84)가 선정됐다. 김 변호사는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 변호사로 유명하다. 묵묵히 법조인의 역사와 변호사단체의 역사를 기록해왔다. 저서만도 십여권에 이른다.
먹고 살기가 급급하기도 했지만 구차하고 궁색했던 시절의 기억은 잊고 싶어서였을까? 우리는 1940~50년대 기록이 거의 없다. 일제시대와 전쟁의 참화를 겪으며 경제성장에 매달려 이제까지 달려왔고 상전벽해의 변화가 일어났다. 그 참혹한 시대를 겪은 분들이 뭐라고 한 말씀 하시려 하면 젊은이들은 한 문장도 다 듣기 전에 휴대전화를 꺼내 들기 일쑤다. 생각해보면 많이 서운할 것 같다. 인터뷰를 요청할 때도 “꼭 해야 하는 거냐?”며 마뜩잖아 하셨다. 할 얘기는 많지만 제대로 쓰이지 못하고, 제대로 평가받지 못할 거라는 생각을 하고 계신듯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서소문동 삼령빌딩에 위치한 한일합동법률사무소를 찾았다. 공증을 주로 하는 소박하고 단출한 곳이었다. 서초동, 강남 일대의 대형법무법인과는 확연히 달랐다. 시간이 잠시 쉬어가는 듯한 사무실을 나와 조용한 커피숍에서 대화를 이어갔다.
“어떻게 법조인의 이야기, 역사를 기록하는 일을 시작하게 되셨나요?”
“책에 다 썼는데 뭐 하러…. 신문이나 잡지에 글을 쓰는 건 합격기를 쓰는 것에서부터 시작했지. 내가 사소한 기록들도 하나도 못 버려요. 고시하기 전에 초등학교 선생을 할 때 운동회 프로그램을 아직도 갖고 있습니다. 1947년도 것이지. 법원에서 보낸 사소한 기록, 공문 같은 것들도 다 보관해. 집에서는 냄새난다고 싫어하지. 다들 아파트 생활을 하게 되면서 더 보관하기 힘들어졌어. 기록들이 너무 유실되고 없어지는데 너무들 경각심이 없어서(글을 썼지).”
1952년 제3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하고 군법무관을 거쳐 사법관 시보로 실무수습을 할 때 법률신문 자매지인 ‘월간 법정’ 1953년 8월호에 ‘곤핍 속에서 뜻을 이루기까지’라는 제목으로 수험기를 게재한 것이 시발이 되어 글을 쓰는 여정을 시작했다.
그는 초등학교 학력이 전부이다. 사법고시 합격자가 워낙 적던 시절이라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편입학 등이 가능했음에도 ‘초등학교 졸업’을 고수했다. 편법을 용납하지 않고 자존심이 무엇보다 소중한 성정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얼어 죽어도 곁불을 쬐지 않는다는 선비정신은 평생을 검박하게 살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나 보다.
초등학교 졸업으로 그 치열한 고시를 어떻게 치르셨냐고 여쭈었다가 ‘수험기를 읽어보라’는 답만 얻었다. 수험기를 읽고 있자니 구구한 개인사를 차마 앞에 두고 말로 할 수 없었음이 짐작되었다.
김 변호사는 1927년 함경남도 영흥군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매년 한두곳 셋집을 옮겨 다니는 어려운 살림에도 아버지는 조선변호사시험과 일본고등문과시험 사법과를 일러 주시며 남자로서 도전해 볼 만한 길이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남자는 의지가 강하고 결단력이 있어야 하며 욕먹지 않는 직업을 선택해야 한다, 방탕한 생활을 하지 말 아라” 등을 늘 이르셨다. 돌이켜 보면 부모님이 변호사로 이끄셨는데 혼자 월남해 내려오면서 변호사가 됐다는 소식도 전하지 못했다. 초등학교를 나와 일용노동자로 일하던 시절을 회상한 글은 가슴 아프다.
“감독이 흙 실어 나르는 트롤리를 미는 나에게 일을 못한다고 할 때는 점심도 굶었을뿐더러 힘도 연약한 열다섯 소년의 사정도 몰라주는 그들의 태도가 너무나 야속하다고 느꼈다. 1월 초순 엄동설한에 영흥역을 기차로 떠나 40리 거리의 고원역에 내려 해뜨기 전 새벽 눈보라가 휘날리고 바람 찬 들판 고원전매서 신축부지 정지작업장에서 손발과 귀가 얼어붙어 동사할 것만 같았고 다른 사람들이 곡괭이로 판 단단한 흙덩이를 내가 짊어진 질통에다 쿵 소리 나게 집어던질 때는 당장 가슴이 찢어지며 쓰러질 것 같았으나 나는 이를 악물고 이 고비를 이겨내야 산다고 생각하며 참고 견뎠다.”
이렇게 낮에는 혹독한 노동을 하고 저녁이면 공부해 열여섯에 함흥역 역부 채용시험에 합격했다. 징용, 보국대 등을 면제받을 수 있었으니 경쟁이 얼마나 치열했겠는가. 기차간 난간에 매달려가다 뛰어내려 기차간 사이에 들어가 차량 사이를 연결한 호스의 공기판을 열거나 닫으며 차량을 연결하거나 떼어놓는 작업을 민첩하게 해야 하는 일이었다. 역부 생활을 하다 보니 초등학교 교원이 되어 재직하면서 공부해야겠다 생각하게 됐다. 사범학교를 나오거나 중학교 졸업 후 사범학교 강습과를 나와야 교원이 될 수 있었는데 14과목의 시험을 치러 교원이 되는 길도 열어두고 있었다. 만17세 미만은 응시자격을 주지 않았는데 평안남도는 예외였다. 오르간까지 쳐야 하는 시험에다 차비도 없는 상황. 악기를 다뤄본 적도 없고 제대로 된 책도 없어 주저하는데 어머니가 “남자가 떠났던 길을 가야지”하시며 단호하게 격려해주셨다. 차비 20원을 빌려 천우신조로 시험시간 전에 도착해 합격의 영광을 얻었다. 열일곱에 역부생활을 청산하고 교원이 돼 부모님을 모실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행복은 너무 짧았다.
1945년 함경남도 영흥군 횡천초등학교 교원으로 일하다 해방을 맞았다. 서울에서 교원을 하며 변호사가 되는 공부를 하고 싶었다. 당시 김 변호사가 존경하는 인물은 링컨. 링컨 같은 훌륭한 인물이 되어야겠다는 의지로 1947년, 삼팔선을 넘었다. 원산까지 가는 기차비 정도였던 75전을 들고 삼으로 지어 만든 신을 신고 옷보따리 하나 없이 나선 길이었다. 그 길이 영영 부모님과 생이별하는 길이 될 줄이야…
“이산가족 상봉신청은 하셨나요?”
나의 질문이 생뚱맞은 듯 쳐다보신다. 그 한이 얼마나 크겠는가. 무슨 로또 추첨하듯 이산가족 상봉자를 고르고 이후에 연락도 할 수 없는 현실. “최소한 서신연락만이라도, 전화라도 할 수 있어야 하잖아요?” 하시는데 목이 멘다. 두고 온 동생 둘과 연락이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을 말해 무엇하겠는가.
1947년 6월 13일 가족을 떠나 혈혈단신 남하해 한 고생은 필설로 다하기 어렵다. 초등학교 선생을 하면서도 끼니를 잇지 못하고 잠은 학교 숙직실에서 해결하며 공부를 해냈다. 하도 굶어서 야위고 쥐에게 물려 열이 나는데도 안색이 창백한 몰골로 부산임시수도에서 치르는 고등고시를 보러 떠난다고 했더니 동료 교사들이 정신이상자로 보았다. 시험 20일 전에 부산으로 내려갔는데 잘 곳도, 먹을 것도 마땅치 않았다. 시장 길가에서 우동을 하루 두번 사 먹고 수십명이 한방에서 자는 여관생활을 버텼다. 빈대가 하도 들끓어 50㎝ 정도 높이의 평상 위에서 하루 3시간 자며 책을 읽었다. 먹으나마나한 우동을 먹고 빈대와 싸우며 읽은 그때, 김 변호사는 눈빛이 종이 뒤쪽을 꿰뚫었을 것이라고 표현했다. 시험기간에는 저녁 한끼만 우동으로 해결했다. 시험이 끝나고 상경할 때는 여비가 없어 무임승차하기도 하고 부산역 대합실에서 며칠을 지내기도 했다.
정말 내가 읽어본 고시합격기 중에 이보다 더한 내용이 있었던가. 역대 최강이다. 이런 고생을 담담히 써내려가 기록으로 남긴 김 변호사에게는 존경의 념이 일지 않을 수 없다. 한번 법률강의를 들어본 적도 없고 제대로 된 책도 없이 도서관에서 베껴 써와서 공부해 일군 합격. 21명이 합격한 제3회 사법고시에서 동차합격은 김 변호사가 유일했다.
가장 고통스럽고 어두웠던 시절을 끝내는 합격증서 수여식장에서 알릴 사람도, 오라고 할 사람도 없어 혼자 서 있으며 느꼈던 것은 회한이었다.
그렇게 고생을 하고 힘들게 법조인이 되었으면 마구 치부라도 할 만하건만 도무지 성격이 그렇질 못한 것이다.
판사생활은 12년 만에 끝을 내고 변호사 개업을 했다. “인간이 인간을 재판하고 붓끝 하나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어려운 일을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적격자인가 스스로 의문을 가지게 된 것이 판사직을 그만둔 이유”라며 전화가설비가 없어 다른 변호사의 전화를 빌려 개업을 했다.
“나는 항상 의뢰인에게 있어서는 생애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하는 중대한 사건이라고 생각해왔다. 변호사 문턱이 높다는 소리를 들어서는 안 되므로 직접 사정을 듣고 처리하는 친근한 변호사가 되고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데 성의를 다하고자 노력해왔다.”
김 변호사는 변호사란 명예가 가장 소중한 성직이라고 생각해왔다. 성심성의껏 일하면 생계유지는 부수적으로 해결될 것이라 믿으며 살아왔다. 의뢰인에게 보수를 요구할 대담성도 결여돼 의뢰인의 어려운 사정만 묵묵히 듣고 있기 일쑤였다. 사무실 유지를 위해 사무직원을 시켜 보수를 받아내면 될 터인데도 그는 “성격상 무리”라고 말했다. 김 변호사에게 사건을 맡긴 사람들은 무료 아니면 실비로 소기의 성과를 얻어갔다. “올바른 판단을 받게 해 주었을 때 보람을 느낄 수 있으면 됐다”고 말하는 그를 보며, 사실 집안 식구들은 얼마나 속상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나는 여지없는 속물이다. 나라면 이렇게 돈 벌 생각 없이 변호사의 길을 명예롭게 가는 것만이면 그래도 참아줄 수 있을 텐데 거기서 한참을 더 나가 자료 수집을 위해 곳곳을 다니고 돈을 들여 팔리지 않는 책도 많이 냈다. 그러니 사모님은 얼마나 힘이 들까. 지금 저술하고 있는 책은 제발 출판하지 말라고 말리신다 하니 충분히 이해가 간다.
수집가 중에는 절대로 남에게 보여주지 않고 절대로 넘겨주지 않는 부류도 많다. 그러나 김 변호사는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곳에는 아낌없이 귀중한 사료를 넘겨주었다. 법원도서관, 평택지원, 서울고등법원 별관에 김 변호사가 넘긴 책과 사료들이 보관되어 있다. 어떤 해에는 김 변호사가 법원에 넘긴 도서량이 대법원이 한해 동안 구입한 도서량보다 많았다.
김 변호사는 서울회와 변협 일도 열심히 하며 ‘변호사이용안내’ ‘변호사핸드북’ ‘법률사무편람’ ‘대한변협 50년사’ ‘변호사법규집’ ‘서울지방변호사회 100년사’ 등 변호사史는 물론 국민이 변호사를 보다 친근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책들을 발간하는 데 힘을 쏟았다. ‘변호사이용안내’는 1984년 서울지방변호사회 법제이사로 있으면서 처음 국민에게 변호사를 쉽게 소개한 책으로 5만부를 찍었고, 서울회는 김 변호사에게 표창으로 감사를 표했다. ‘잊을 수 없는 법조인’ ‘한국법조인 비전’ ‘법조인의 길 법조인의 삶’ 등 훌륭한 법조선배들의 삶을 조명하는 작업을 꿋꿋이 해왔다. 일본변호사와의 교류회 등으로 일본을 다녀오면 어깨가 한달은 아프도록 자료를 가져와 검토했다. 일변연에서 간행하는 ‘자유와 정의’는 30권을 구독해 지인들에게 부쳐주기도 했다.
1995년에는 휴업을 해 주변을 놀라게 했다. “나이 들어 법정에 서는 게 폐를 끼치는 거라 생각했어요. 보청기 끼고도 판사가 하는 말 제대로 못 알아듣고 ‘네? 네?’ 하는 거, 하기 싫었어요.” 그의 깔끔한 성격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작파하고 집에서 책을 읽다 법률신문 상임편집인이 되어 언론인의 길에 들어서기도 했다.
“법률신문 일은 어떠셨어요?”
“아휴, 그거 정말 어렵더군요. 교정보고 제목 정하는 게. 잘했다는 사람, 잘못했다는 사람 있고 전화해서 다짜고짜 욕을 퍼붓는 사람도 있더군요.”
간략하게 당시의 어려움을 전했다.
김 변호사는 휴업 5년 후인 2000년에 한일합동에서 공증업무로 변호사 일을 다시 시작해 지금까지 업무에 매진하고 있다.
“공증이 쉬운 것 같아도 법조인이 증명하는 서면이기에 잘못되면 다 책임진다는 각오로 한자한자 열심히 읽고 검토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올해로 문을 닫아야 합니다.”
법무부에서 공증인의 자격을 75세까지로 제한한 법률이 내년에 시행된다. 등 떠밀려 그만두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나.
“변호사는 말이죠, 최신 판례는 물론이고 다양한 방면의 논문도 열심히 읽어야 합니다. 꾸준히 실력향상을 꾀해야죠. 변론의 논리를 만들 때 어디를 뒤지면 답이 나오는지는 알아야죠. 제 경우에는 완벽하게 위조된 등기부 사기단의 피해자 변론을 맡았을 때 몇날며칠 일제시대 관보를 다 뒤졌어요. 점심을 거르며 찾다 보니 그 임야가 보안림에 편입된 기록이 나와 위조등기부라는 걸 증명한 적도 있어요. 변호사는 자기 전문분야를 만들어 매진해야 합니다. 외국변호사 자격증도 다들 가지도록 노력했으면 합니다.”
젊은 변호사들에게 부탁하는 당부의 말도 끝없이 이어졌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윤리였다. 변호사의 윤리를 지켜야 한다는 것. 이미 몸으로 실천해온 선배 변호사의 간곡한 당부라 그 울림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백발이 성성한 가운데도 기억에 남는 변론을 하나하나 꼽으며 어떻게 승소했는지를 말해주는 김이조 변호사의 모습은 젊은 변호사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에게 법률문화상 수상은 너무 늦게 주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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