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현장 경험 살려 여성법조인 정치진출 많아져야”

1941년, 옥스퍼드 대학은 처칠에게 졸업식 축사를 30분 분량으로 해달라고 요청했다.
졸업식날, 처칠은 시가를 입에 물고 연단에 올랐다. 모두들 숨죽이며 수상의 입에서 나올 축사를 기대했다. 그가 천천히, 나지막하게 말했다.
“Don’t give up!”(포기하지마라!)
그리고는 청중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청중들은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는 좀 더 힘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Never give up!”(결코 포기하지 마라!)
순간 강당은 고요 속에 빠져들었다. 처칠은 느릿느릿 시가 한 모금을 빨고는 청중들을 향해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Don’t you ever and ever give up!”(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
그것이 졸업식 축사의 전부였다. 3분도 채 되지 않았다. 처칠은 다시 모자를 쓰고 여전히 시가를 입에 물고 느릿느릿 연단을 걸어 내려왔다. 사람들은 박수를 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일어서서 박수를 쳤다. 어떤 이들은 울먹였다.
처칠의 ‘결코 포기하지 말라’는 메시지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영국의 젊은이들을 다시 도전하게 만드는 힘을 주었다.
처칠의 이 격려는 안귀옥 변호사에게도 도전하는 용기를 주었다. 이 일화는 안 변호사를 설명하는 키포인트라 할 만하다.
안귀옥 변호사의 사법시험 합격은 언론의 주목은 물론 대통령이 직접 전화할 정도로 화제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공장 생활을 시작해 동생들 학비를 대가며 공부해 이룬 기적이었기 때문이다.
7월 16일, 덥고 습한 날씨에 서울 서초동 변호사회관을 출발했다. 한시간여를 버스차창에 머리를 부딪혀가며 졸다가 인천지법 앞 안귀옥 변호사 사무실을 찾았다.
며칠 전 여성변호사대회에서 안 변호사를 만나 바로 인터뷰를 해야겠다 마음먹었었다. 약속시간을 잘못 잡아 한시간여 기다린 끝에 만나 더 반가웠다. 연락 없이 들이닥친 꼴이 돼버렸는데 여의도에서 한달음에 달려와 주었다.
“여의도는 무슨 일로요?
재보궐 선거라도 있나요?”
“하하, 그건 아니고요. 김두관 민주당 대선후보를 돕기 위한 모임에 다녀왔어요. 인생 스토리랄까, 저랑 일치하는 부분이 많아 민주당 경선부터 우선 준비 중이에요.”
안귀옥 변호사는 지난 총선에서 인천 남구을에 출마해 윤상현씨에게 패했다. 실향민출신에 입지전적 인물인 안 변호사지만 인천 연수구에 예비후보로 등록했다가 지역구를 옮긴데다 보수적인 지역이라 여성인 점도 불리했다. 상대가 전두환 전대통령의 사위인데다 현직의원으로 선거기간 동안 박근혜 대표가 4번을 다녀갈 정도로 지원해 힘겨운 싸움이었다.
“정치에는 어떻게 뜻을 두게 됐어요?”
“뭐, 1997년 변호사 개업할 때부터 정치권으로부터 이런저런 제의를 받았어요. 그때는 더 파격적이고 좋은 제안이 많았죠. 사실 합격당시에 워낙 언론의 조명을 받아서 섭외가 이어졌었습니다. 당시에는 변호사 업무에 충실해야 한다는 생각에 일절 염두에 두지 않았어요. 정신없이 변호사 일에 파고들었죠. 한 10년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우리 사회가 왜 이렇게 행복하지 않나, 생각하게 되더군요. 2003년인가요? 이혼율이 폭증한 때가 있었어요. 그런데 인천지역 상담소 400여 군데의 80~90%가 사후상담에 치중하더라고요. 이혼이라는 게 하루이틀에 결정되는 게 아닌데 일 터지고 수습하는 것보다 미리미리 갈등의 소지를 줄여가는 역할을 하는 기관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사단법인 ‘한국행복가족’을 만들고 ‘건강한 사람을 더 건강하게’를 목표로 포럼, 집단상담 등을 진행해왔습니다. 또 이혼하는 과정에서 감정적, 정서적 문제가 잘 정리돼야 재혼도 잘 할 수 있기에 관계해소의 어려움을 덜어주는 과정도 진행하고요. 그러다보니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것을 계기로 정치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어요.”
안귀옥 변호사는 인천 연수구청장 선거에 출마하는 것으로 정치를 시작했다. 당시에는 열린우리당 공천으로 나가면 떨어지는 걸 알면서도, 어떤 사명감 때문에 감행했고 열심히 뛰었다. 이번 4·11 총선에서도 연수구로 준비했다가 당의 명령에 떠밀려 남구을로 나가게 됐다. 이를 두고 통합민주당 강철규 공천심사위원장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가장 안타까운 인물로 안귀옥 변호사를 지명하기도 했다.
“이번 총선에서 낙선하셨는데요. 무엇 때문에 정치가 하고 싶으셨나요?”
“전 여성법조인들이 많이 정치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분쟁의 현장에서 느끼고 체험한 것들이 반영되고 잘못된 것을 고칠 수 있는 건 정치니까요. 제가 출마한 지역구만 해도 제가 인천대에 입학하던 1983년도에 비해 오히려 더 낙후됐어요. 신도시 개발에 치중되면 원도심은 더 삭막해지는 거죠. 사람위주의, 인권옹호차원의 재건축 재개발을 고민해야 합니다. 제가 공천심사위원회에서 심사를 받을 때 질문 중 하나가 여성인권 개선대안을 묻는 것이었어요. 제가 그랬죠. 있는 그대로만 봐주면 된다고요. 예를 들어 감기약의 적정용량이 누구를 기준으로 한 것인지 아세요? 70㎏의 건강한 성인남성이에요. 40㎏인 성인여성에게 치명적일 수도 있지만 그런 건 고려되지 않아요. 남자들 위주로 모든 기준을 세워놓고 여자는 허겁지겁 그에 따라 기를 써야 하는거죠. 에어백 폭발 사망사고가 여성이 남성보다 6배 많다는 거, 아셨어요? 복지란 그런 거예요.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현실은 어떤가요? 신체적 상황이 전혀 다른데도 모든 안전기준은 남성에만 맞춰놓는 거죠. 남성들은 남녀불평등을 느끼지 못하죠. 다 자기들 기준대로니까. 가설주차장에 한번 가 보세요. 구멍 뚫린 철판들로 바닥을 해 놓아 여성들은 걸을 수가 없어요. 구두굽이 빠져서요. 전혀 배려가 없는 거죠. 복지를 제대로 하려면 아이는 아이에게 맞게, 여성은 여성에게 맞게, 장애인에게는 장애에 맞게, 그에 맞는 지원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하고 싶은 것 중 하나가 산부인과 진료시스템을 여성을 위한 것으로 바꾸는 거예요. 출산과정과 진료시스템이 남성의사 편리한 대로 맞춰져있어요. 10년 전부터 제가 주장해오던 건데요. 이걸 바꾸어 나가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남들이 평범하게 보아 넘기는 일도 안 변호사는 꼼꼼히 챙긴다. 이런 것들이 인권감수성이고 여성변호사들의 강점이 아닐까? 여성변호사들이 국회에 많이 진출하면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여성을 옭죄고 있는 불평등한 기준과 제도가 개선되지 않을까? 특히 안 변호사가 이렇게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그의 남다른 인생이력 때문이다. 그가 1995년 제36회 사법시험에 합격했을 때 언론의 주목을 많이 받았다.
초등학교 6학년이던 열두살 때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했다. 야반도주를 하듯 식구들이 도망쳐나왔고 안 변호사는 나이를 속이고 공장생활을 시작했다. 처음 취직한 곳은 전기부품회사. 전기소켓을 만드는 공장에서 하루종일 드라이버로 볼트를 조였다. 안 변호사는 지금도 지장을 찍으면 지문이 잘 나오지 않는다. 어머니는 평생 몸무게가 40㎏를 넘지 않을 만큼 병약한 분이었다. 할 수 있는 잔업을 모두 해도 절반이 어머니 약값으로 들어갔다. 5남매의 둘째로 오빠와 안 변호사가 공장일을 해 가족을 먹여살리고 동생들을 학교에 보냈다. 한국노동운동사의 한 획을 그은 사건으로 평가되는 YH무역에서도 일했었다. 소켓공장, 가발공장, 의류공장 등 조금이라도 일당을 많이 주는 곳으로 옮겨 다녔다. 그렇게 살아오면서도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다. 야간학교를 다닐 수 있는 조건의 공장을 찾아다니려니 몇 달 만에 옮기는 일도 다반사.
왜 쟤만 편의를 봐 주냐는 질시에 오래 다니기 힘들었다. 그렇게 옮겨 다니는 사이에는 행상을 하기도 했다. 줄줄이 커가는 세 동생과 날로 허약해지는 외할머니와 어머니, 자신의 모든 꿈을 포기한 채 집안의 가장노릇을 하는 오빠를 생각하면 공부를 위해 일을 줄이기도 힘들었다. 몇 년을 지방을 돌아다니며 과외선생을 하기도 했다. 방랑의 시기였다. 그렇게 돌아다니며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보았다. 마침내 자신을 위해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1980년 검정고시학원에 등록했다.
“남들과는 다른 청소년기를 보내셨는데요. 그렇게 어려운 과정을 견뎌내고 꿈을 이루게 한 동력을 무엇인가요?”
“어머니가 참 지혜로우셨어요. 병약한 분이었는데 자식들에게 각자에게 맞는 예견을 해주셨어요. 저한테는 제가 태어난 지 백일쯤 되었을 때 탁발하러 오신 스님이 나중에 크게 될 아이다, 부모도 우러러 보는 사람이 될 거라는 예언을 하셨다는 거예요. 그런 얘기를 계속해서 들으니 나중에 커서 흠 잡힐까 싶어 휴지도 함부로 못 버리겠더군요. 늘 제 인생의 가이드라인이 되어 주셨다고 할까요. 미래를 바라보며 참아낼 수 있었어요. 어렸을 때 부모가 해주는 말들은 아이의 평생을 좌우하는 것 같아요.”
안 변호사를 힘든 환경에서도 꿈을 향해 달릴 수 있게 만든 것은 가족이었다. 혼자였다면 경제적으로 오히려 덜 힘들 수도 있었겠지만 버틸 수 있고 포기할 수 없게 만든 것은 가족의 힘이었다.
“언제가 가장 힘들었어요?”
“힘들었던 기억이 없는데요. 하하. 어렵다는 건 상대적인 거잖아요. 열두살에 공장을 다니고 식당에서 설거지를 할 때도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한 과정이라는 믿음이 있어서 받아들였어요. 근데 사법시험 2차에 네 번을 떨어지고 다음 해 1차에 떨어졌을 때, 그때 처음 절망했어요.”
그렇게 어렵게 사법시험공부를 했다. 인천대학교 최초로 사법시험에 합격하기까지 고시반 간이침낭에서 숙식을 해결해가며 공부했다. 4시간 이상 자는 것도 사치였다. 그렇게 공부했으니 변호사 생활이 정말 소중하게 느껴진다.
“인천 여성변호사로 처음 개업해서 업무를 해왔고, 몇 년간은 인천에는 여성변호사가 한두명밖에 없었어요. 지금은 여성변호사 수가 늘어서 40여명과 점심 먹는 모임도 있답니다. 처음에는 남자변호사만 가는 인천회 야유회에 아이들을 데리고라도 참석하곤 했죠. 이젠 수가 많아져서 제가 아니어도 되겠다 싶어 소홀해지긴 했지만요. 힘들수록 회를 중심으로 단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인천회 활동도 열심히 하는 편인데요, 지난해 보니 법률구조 사업비가 책정돼 있는데도 30년 동안 집행이 되지 않았더라구요. ‘이래선 안 된다’고 제가 나섰어요. 지난해부터 법률구조단장을 맡아 열심히 활동하고 있어요. 가능한 구조신청 일주일을 넘기지말고 구조 가능여부에 대한 회신을 주자는 게 저희 방침이에요. 운영위원회원 다섯명이 결정하거든요. 23명의 변호사가 로테이션으로 봉사하고요. 인천 구월동 살해사건처럼 이슈가 되는 사건도 했고요.”
안 변호사는 사법시험에 대한 애착과 긍지가 크다. 사법시험이라는 방식이어서 안 변호사처럼 경제적 형편이 어려워도 법조인의 길이 도전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법학전문대학원처럼 화려한 스펙을 자랑하는 이들이 법조인이 되는 것에 좀 회의적이다. 건전하고 건강한 상식을 가진 사람들이 법조인이 돼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변호사가 다루는 사건의 대부분은 그렇게 창의성을 요하지 않는 게 현실이다. 안 변호사처럼 힘들고 어려운 사람도 건강하고 노력하면 사다리를 오를 수 있는 희망을 줘야한다고 생각한다. 법학전문대학원이 있더라도 사법시험이 존치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안 변호사님이 가지지 못한 게 하나 있네요. 아들만 셋이라니, 딸이 없어 서운하시겠어요.”
“네. 정말 그래요. 거기다가 아이들이 다 아빠를 닮아 법 쪽에는 흥미가 없어요. 성향이 다 다른데 첫째, 둘째는 예술가형, 셋째는 자연과학 쪽에 흥미가 있어요. 며느리는 법 쪽으로 한번 기대를 해볼까요? 하하. 아이들은 각자 타고난 환경에 적응하기 마련이고 아이에게 맞는 교육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머니에게 제가 배운 것은 크게 될
거라는 확신을 심어주고 끊임없이 ‘네가 자랑스럽다’는 말을 해주신 것, 자존감을 세워주신 교육방침이에요. 여성변호사들을 보면 일이 많아서 자녀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걸 항상 미안해해요. 저는 그게 그 아이의 타고난 ‘운명’이라 생각해요. 못 받는 부분이 있는 만큼 넘치게 채워지는 부분도 있을 거잖아요? 양보다 질이 중요해요.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에서는요. 조바심 내며 아이를 키우기보다는 성향을 잘 파악하고 아이에게 필요하다고 느껴지는 부분만 지원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해요. 부모가 해줄 수 있는 것, 생각보다 많지 않아요. 공부만 잘 한다고 훌륭한 사람 되는 것도 아니고요.”
요즘 부모들은 많이 해주기 위해 애쓰는데 아이들은 그게 괴롭다고 한다. 인터뷰 중에도 안 변호사의 아들들에게서 문자가 많이 왔고 간단하게라도 일일이 답을 해주었다. 안 변호사는 참 지혜롭게 자녀들을 대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이런 든든한 배경을 기반으로 안 변호사의 도전은 결코, 중단 없이 계속될 것이다. 이런 변호사들이 많이 나와주길 빌면서 서울로 오는 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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