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수록 회를 중심으로 뭉쳐서 이겨 내야죠”

멀리서 보면 반짝거려서 예뻐 보여도 가까이 다가가 보면 평범한 유리조각인 경우가 있다. 또 나는 아무렇지 않게 소유하고 있는 것이 실상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소중한 어떤 것일 수도 있다. 대한변협 부협회장으로 4년 가까이 일하고 있는 위철환 변호사는 후자의 경우 같다. 가까이 있어 잘 몰랐지만 보석같이 소중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 전체를 위해 묵묵히 일하고 있는 사람.
사실 소리 없이 일하는 이런 분들이 대접받아야 하는 게 아닐까? 9일 아침 이사회에 참석하기 위해 서둘러 온 위철환 변호사를 붙잡고 인터뷰를 시작했다.
“경기고등법원의 필요성이요? 인구가 1200만이에요. 전국 모든 도에 고등법원, 고법 원외재판부가 있는데 경기도만 없어요. 지역주민들이 서울로 다니기 불편해서 항소를 포기하게 돼요. 경기도의 법조계뿐 아니라 단체장, 국회의원을 망라해 경기고등법원설치추진위원회를 만들어 마라톤대회나 큰 행사가 있으면 나가서 서명운동하고 도민들 상대로 홍보활동도 하고 그래요. 이젠 지역주민들이 저를 미스터 고등법원이라 불러요. 헌법소원도 제기하고 입법청원도 했습니다. 할 수 있는 건 다 하고 있는 셈이죠. 아, 대법원과 국회에 약 백만명분의 지지서명을 전달했습니다.”
위철환 변호사에게 경기고등법원 유치에 대해 질문했더니 청산유수, 끝없이 이어진다. 대전-청주의 경우 서울과 수원보다 훨씬 가깝지만 대전고법과 고법 원외재판부가 있다. 부산-창원, 광주-전주도 그렇다. 춘천은 고속도로로 서울과 1시간 거리지만 원외재판부가 있다. 서울은 하도 교통정체가 심해 수원은 차라리 대전을 가는 게 빠를 지경이다. 고법을 이용하기가 불편하면 사람들은 항소를 하고 싶어도 포기하게 된다.
춘천은 원외재판부가 생기자 몇 달 만에 항소가 두배 가까이 폭증했다. 사람들이 그만큼 포기했었다는 반증이다. 경기남부의 경우만 해도 서울고등법원 사건의 약 30%를 차지한다. 경기도는 남부권역, 북부권역으로 나뉘는데 우선 남부권역에 수원 고등법원 설치와 북부권역인 의정부에 고법 원외재판부 설치를 바라고 있다. 남부권역의 인구만 해도 약 800만명에 이르기 때문이다.
6월 말 김진표 의원 등이 ‘각급 법원의 설치와 관할구역에 관한 법 개정안’을 제출한 상황이니 위 부협회장의 숙원이 이뤄지지 않을까.
“도대체 왜 수원에서 개업을 하셨나요?”
“저는 수원에서 태어난 건 아니고요. 사법연수원을 수료할 때 동기인 친구가 권해서였어요. 그 친구는 수원서 나고 자란 토박이인데 수원에서 일하자고 권했어요. 한 건물에서 나란히 개업해 서로 도우며 일해 왔는데 그게 벌써 24년째네요.”
그의 성품이 드러나는 대목인 것 같다. 사람을 믿고 끝까지 간다. 삼 년째 부협회장으로 일하는 걸 지켜보면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한결같다.
“사법시험에 합격할 때까지의 과정을 말씀해주세요.”
사실 법조인에게 힘들었던 경험 이래 봐야 고시합격까지의 과정 아니던가. 힘들 때 그 사람이 드러난다고들 하는데 대개의 고시합격기는 어떤 사람인가를 느끼게 한다. 똑같은 고시합격기가 없는 이유다. 그러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이건 ‘공부가 힘들었어요’수준이 아니었다.
“시골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지방의 명문고교에 시험을 쳤어요. 제가 비평준화 마지막 세대거든요. 고등학교에 떨어지자 큰 충격을 받았어요. 4남1녀 중의 장남으로 농사짓는 부모님께 저만 뒷바라지해주시길 바랄 수도 없고 해서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친척 집을 전전하며 생활실험을 한 셈이죠. 신문 배달, 구두닦이 안 해본 게 없습니다.”
지금은 담담히 그 시절을 떠올리지만 열일곱이 마주 선 세상은 얼마나 차가웠겠는가.
끼니를 해결하는 것조차 힘겨웠다. 혼자 눈물도 많이 흘렸다. 골목길을 걸을 때면 슬레이트 지붕 위로 널어놓은 누룽지를 주워 먹었다. 늘 배가 고팠고 겨울이면 손발이 얼어 터졌다. 자존심은 하늘 높은 줄 몰랐는데 현실은 한없이 낮기만 했다.
“또래들이 고등학교에 다니는 걸 보니 그렇게 부럽더군요. 중졸로는 제대로 사회에 진입할 수 없겠다는 절망감도 들고. 그래서 중동고 야간에 들어갔습니다. 같이 신문배달하던 친구들이 상고, 공고 가는데 전 인문계를 고집했어요. ‘길게 보자’생각한 거죠. 2년 동안 일만 하다 고교에 진학하니 힘들더군요. 두살 어린 친구들과 주경야독으로 공부하다 보니 처음엔 많이 헤매다 졸업할 때는 수석으로 졸업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고교를 졸업하니 덜컥 군대 영장이 나왔다. 선생님 한 분이 군대를 가기 보다는 서울교대에 입학해 학군단에 들어가면 복무하면서 공부할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의 운은 그때부터 풀렸나 보다. 서울교대에 합격하고 굶기를 밥 먹듯 한 몸으로도 신체검사를 통과해 무사히 RNTC무관후보생이 되었다. 사실 중동고가 당시 좀 거친 분위기였는데 야간은 더했을 터. 서울교대에 들어가 보니 남성보다는 여성들이 특히 명문고 출신에 수재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위축감도 들었지만 금세 극복했다. 반골기질로 군사독재 시절을 무사히 넘기지 못해 군법회의에 회부될 위험도 몇 번 넘겼다. 당시 교육대는 서울대와 더불어 국립대학으로 등록금이 적었다. 더군다나 2년제였다.
졸업 후 미아리고개 넘어 청덕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당시 덕수상고를 나와 성대법대 야간편입생으로서 사시에 수석 합격한 조재연 변호사의 이야기를 접했다. 은행원이던 조 변호사의 신화 같은 이야기에 그가 다닌 성균관대 야간에 편입지원했다. 청덕국민학교 다음에 간 안암국민학교도 보문동이라 주경야독으로 야간대학 다니기 좋았다. 대학졸업 후 낮에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밤에는 공부에 매진, 1년 만에 1차에, 그다음 해에 2차에 합격했다. 1987년 1월 고시계에 ‘무작정 상경 13년의 결실’이라는 제목의 합격기를 쓰기도 했다. 연수원 수료 당시 로펌이 지금보단 지원이 적었고 변호사 개업을 하는 경우는 유명한 변호사 밑에서 2년, 3년씩 수련을 쌓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용기백배한 청년, 위철환은 단독개업을 택했다.
“사실 국민학교 교사를 6년가량 했으니 사회경험도 있다고 자신했던 거죠. 사실 제일 순진한 게 국민학교 선생인데 말이죠. 밑바닥 생활을 경험해봤고 하고자 하는 방향만 옳다면 의지의 문제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부터 독자적으로 해보겠다고 결심했어요. 나이도 있었고. 순진했던 거죠. 참 어렵습디다. 요새 어렵다고 하는데 처음 시작하는 것은 다 어려워요. 의뢰인들이 보자마자 판사하다 나왔느냐, 검사하다 나왔느냐고 물을 땐 난감해요. 그때는 경제전반이 어렵고 위축된 시기라 그 나름의 어려운 부분이 있었습니다.”
변호사를 하면서 나름대로는 악습이나 나쁜 관행을 따르지 않겠다는 각오를 했지만 쉽지 않았다. 정의감이나 도덕적 가치를 지키려 들면 사무실 유지도 못하겠다 싶기도 했다. 서울과 또 다르게 지방에서 용인하는 악습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악습을 보는 잣대가 엄격해지고 깨끗해지고 있음을 느낀다. 십여년 전, 수원 법조비리가 터졌을 때 수십명에 달하는 수원지역 변호사가 징계, 과태료, 실형까지 선고받았다.
“그 당시에 좀 한다 하는 변호사님들은 다 연루됐었어요. 나는 변호사 축에도 못 낀다고 우스갯소리하고 그랬죠. 제가 ‘한 점 티끌 없이 깨끗하다’고는 못해도 나름대로 원칙을 지키며 살아왔어요. 그런 게 지역에서 신뢰를 쌓아 지방회장에도 당선된 것 같아요.”
그가 지방변호사회 회장이 된 것도 한편의 드라마다. 부장판사 출신에 제1부회장을 4년 한 분이 이미 기반을 다져 당선이 거의 확실시되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국회의원 출마경험이 있는 판사출신까지 출마해 3파전이 됐다. 화려한 경력의 엘리트들이었다. 그때까지도 변호사회는 명망가들이 순차적으로 회장을 맡는 분위기였다.
“사실 제가 할 자리가 아니었죠. 그러나 변화의 물결을 만들어보자는 각오로 덤볐습니다. 경기중앙회는 부회장들 두 명과 러닝메이트로 입후보해야 하는데 등록 직전에 겨우 팀을 짤 정도였어요. 그러나 제겐 자발적 응원자들이 많았어요. 결선투표제가 있었는데 1차에서 제가 압승했습니다. 두 분을 다 합쳐도 제 절반 조금 넘는 정도였죠. 변화의 물결을 느꼈습니다. 일부에서는 제가 너무 강성으로 과격한 정책을 쏟아낼 거라는 우려를 했었는데 전혀요, 저는 온건하고 점진적인, 합리적인 변화를 추구합니다. 변호사 사회는 진보든 보수든 좌든 우든 다 회원이고 융합해야 합니다. 그렇게 회 안에서 단결하도록 만드는 회무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렇게 격렬하게 반목하던 사람들도 위 변호사를 통하면 대화가 됐다. 일종의 중재자, 창구의 역할을 했다.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든 다 받아들여 제3의 대안으로 수렴된다. 변호사라는 공통분모를 가진 사람들이니까. 위 변호사의 진정이 통했는지 2년 회무를 끝내니 ‘협회장 직선제’와 ‘경기고등법원 유치’라는 과업을 다 이행하지 못했으니 더 해서 완성하라며 무투표지지로 회장직이 연장됐다. 얘기가 나온 김에 직선제 통과의 뒷얘기를 들었다.
“사실 변협 부협회장의 지방변호사회 회장 몫 두 자리는 13개 지방회에서 번갈아 맡는 것이 관행이었어요. 그런데 직선제 쟁취의 염원으로 지방회장들이 제가 부협회장을 맡는 게 좋겠다 하셨죠. 그러니 제 어깨에 달려있다는 생각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어요. 극심한 반대에 대한변협 원로들까지 나서서 다음으로 미루라고 하실 정도였고 변협이사회 분위기도 ‘우리가 왜 이 짐을 져야 하나’라는 게 있었고요. 저는 민주주의의 대원칙, 보편적 정의니까 실현가능하다고 믿었어요. 지방회원이 이등회원 취급당하는 걸 더 이상 참을 이유도 없었고 수는 열세여도 가능하다고 확신했어요. 회원들의 오랜 염원이 이뤄진 순간 정말 뿌듯했습니다.”
대한변협 협회장 직선제의 의미는 지방회원도 한 표를 행사하게 되었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회원 내부만이 아니라 외부의 시각도 달라진다. 1만3000여 회원의 손으로 뽑힌 직선제 회장은 법조삼륜의 수장으로, 국회와 정부에 대해서도 바른 소리를 하고 불의와 싸워나갈 힘을 얻게 될 것이다. 변협의 위상이 달라지면 변호사의 위상도 달라지는 것. 변화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위철환 변호사는 최근 국회개원이 늦어지자 변협이 법적조치를 취하겠다고 나선 ‘국회소송단장’을 맡기도 했다.
위 변호사는 “국민이 극심한 가뭄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고통받는 마당에 국회가 직무를 유기해 국민의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하는 상황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라며 “대한변협은 정의와 인권을 대변하는 기관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목소리를 낸 것인데 국민의 호응이 무척 커서 놀랐습니다”고 말했다.
변협의 성명과 일련의 조치발표 이후 곧바로 국회개원의 성과를 낳았고 모처럼 대한변협이 존재감을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앞으로도 쓴소리를 해야 할 때는 바로바로 할 줄 아는 변협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렇게 바른 소리를 하니 국회 개원식에도 예년과 다르게 변협 협회장을 초대했다. 대통령 직속의 국가지식재산위원회가 특허침해소송에 변리사 소송대리권 부여를 검토하고 있고 변호사법 개정안에 변호사중개제도가 들어가 있는 등 앞으로 싸워나가야 할 현안이 산적해 있다. 업계의 현실과 법률서비스의 의미를 모르고 하는 얘기들에 단호히 대처하겠다고.
“회무에 무관심하고 자기 일만 하는 것 같은 분들도 다가가 얘기해보면 많은 애정과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걸 알게 됩니다. 회와 자기가 맞지 않는다, 나와 관련 없다는 생각으로 무관심하셨던 거죠. 이런 분들과 소통하고 이런 분들이 의견을 낼 수 있어야 회가 제대로 역할을 하게 된다고 봐요. 사실 법조인이 소극적인 분은 드물어요. 바쁘고 일에 치여 그런 거지. ‘변호사회가 발전해야 내 일이 잘된다’라는 인식을 하고 그 인식이 실현되게 해야죠.”
위 변호사는 현재의 어려운 법조시장에 대해서도 고심하고 있었다.
“먹고 살기 힘들수록 머리를 맞대야 합니다. 힘들수록 힘을 합치고 머리를 맞대다 보면 돌파구가 보일 거예요. 사실 20년 넘게 한 사람들도 힘들어하고 로펌도 다르지 않아요. 그렇지만 사회에는 우리보다 더 힘든 처지, 어려운 상황인 분들이 많잖아요? 우수한 인재들이 머리를 맞대면 뭐가 불가능하겠습니까? 가만히 앉아서 사건을 기다리는 시대는 갔고 여러 상황도 변했습니다. 능동적으로 수요를 창출해야죠. 예를 들어 지방자치단체, 국가기관들의 소송수행담당자들이 인사철마다 바뀌니 법원도 힘들어해요. 이제는 전문가가 맡아야죠. 이런 일들이 가능하도록 힘을 모아 다시 한번 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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