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계약법의 통일을 꿈꾸다”

대한민국 민법학계의 태두 이영준 변호사(74)를 만났다.
“요새 근황은 어떠신가요?”
“2007년에 수정판을 냈던 민법총칙의 개정증보판을 내기 위해 작업 중입니다. 그 동안에도 판례가 워낙 많이 나와 쌓여서 그 큰 흐름을 제시하는 데 그치고 그 대신 저의 종래의 주장을 반박하는 학설에 대해 제 입장을 부연하는 방침으로 기술하고 있어요. 박영사에서 저의 민법총칙이나 물권법 등 저작물을 전자책으로도 출간하려하고 있어 더욱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요샌 70대 중반이 인생의 전성기인 것 같다. 큰 키에 부드러운 말투로 자세히 설명하는 모습에서 70대라는 느낌을 전혀 받을 수가 없었다.
지금의 법조인들은 이영준 변호사에게 많은 신세를 졌다. 아니 어쩌면 그로 인해 힘들었을 수도 있겠다. 이영준 변호사의 민법총칙이 처음 출간되었던 1987년까지 곽윤직 민법시리즈만 보면 되던 것이 이영준 변호사의 책으로 이론이 양분되자 공부량이 몇 배 늘어난 셈이 됐으니까. 나도 수험생활을 할 때 이영준 변호사의 저서를 읽으며 쩔쩔매긴 했지만 정말 도움을 많이 받았으니 그에게 큰 빚을 진 셈이다. 수험생들을 몇 배 더 피곤하게 만든 배경을 물었다.
“그건 세계적인 민법 학풍의 변화와 맞물려 있어요. 종래 독일을 중심으로 한 세계의 사법이론은 공공복리와 거래안전에 주안점을 둔 방법론에 입각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그것이 나치의 획일주의를 방조했다는 반성과 함께 인간의 존엄과 가치, 사적 자치, 즉 Privatautonomi를 더욱 강조하는 이론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이러한 흐름이 정당하다고 생각했고 개인의 의사에 의해 법률효과를 도출하면서도 거래안전을 도모하는 논리를 펴나갔습니다. 이른바 ‘신의사주의’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저의 견해는 표시주의에 기운 당시의 통설과 결론을 달리하거나 결론이 같더라도 이론전개 과정이 달라서 다소 난해한데도 학생들에게 읽어야할 책으로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이영준 변호사를 일러 남들의 3배를 사는 사람이라고들 한다. 재판하기도 바쁜 판사 시절에 독자적 학풍을 전개하는 저술, 강의를 계속해왔다. 판사 시절에도 강의는 쉬어본 적이 없다.
“도대체 시간은 언제 내시는 거예요?”
“밥 먹고 자고 운동하는 거 빼곤 공부를 하지요. 젊었을 땐 술도 마시고 친구들도 많이 만났지만 이젠 친한 친구들을 만나도 점심같이 하는 정도? 생각해둔 것도 금방금방 잊어버리니 메모나 녹음에 자주 의존해요.”
대개의 수험생에게 사법시험의 최대 난관은 민법인 경우가 많다. 방대한 내용, 하루가 다르게 쌓이는 판례, 그리고 그 방대한 내용을 일관된 시각에서 정리하는 학설전개에는 아무리 원고지를 볼펜으로 메꾸던 시대와 달리 컴퓨터와 같은 첨단기계를 사용한들 쉽게 될 리가 없을 터. 내년 초 신학기에 맞춰 준비하고 있는 민법총칙은 1000여 페이지를 500페이지로 면수부터 줄이려고 한다. 법서 출판계가 너무 위축돼 있어 큰일이다. 수험생 수가 적어져 법조 실무가도 참고할 만한 수준이 돼야 출판이 가능하다고 설명해주었다.
그가 몇 년째 가장 노력하고 있는 것은 동아시아에 공통되는 계약법을 만드는 것. 단일경제권내에 통일된 계약법적용은 서구유럽에서는 익숙한 일이다. 1980년에 UN국제물품매매조약(CISG)이 채택됐고 1998년에는 유럽계약법원칙(PECL)이 마련됐다. 하지만 그동안 아시아 각국은 점차 동일경제권을 형성하면서도 통일된 법원칙 마련작업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 게 사실이다. 이영준 변호사가 아시아 각국이 공감할 수 있는 아시아계약법원칙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자유무역협정(FTA) 등을 통해 세계시장이 단일화되고 있다. 단일화된 시장은 단일한 계약법에 따라 규율되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저는 십수년 전부터 국내외 학술대회에서 아시아계약법 통일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주장해 왔습니다. 유럽 계약법 원칙은 1999년 양창수 서울대 교수가 번역했고 박영복 교수 등 많은 학자들이 이에 대한 논문을 내왔는데, 저는 유럽계약법 원칙에 버금할 아시아계약법 통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2002년 한국민사법학회장으로 취임하면서 한국민사법학회 내에 ‘동아시아거래법통일연구위원회’를 구성했고 2006년에는 재단법인 한중일민상법통일연구소를 설립하는 등 아시아계약법 통일을 위한 작업을 꾸준히 해왔습니다.
2009년 10월 열린 베이징 칭화대학 학술대회에서 아시아계약법원칙(Principle of Asia Contract Law)을 제정하기로 한시웬 칭화대 교수, 일본 가나야마 나오키 게이오대 교수와 저, 3국 교수가 합의를 했습니다. 그 직후인 11월 4일에 저는 서울대와 공동으로 ‘동아시아계약법’학술대회를 열었습니다. 이 자리에 참석한 한국 학자들로부터 한국 측의 PACL 초안을 기초하도록 위임받았고 이에 따라 PACL 채무불이행 편을 기초하였습니다.
아시아계약법 통일프로젝트에는 한국외에 중국, 일본, 싱가포르, 대만, 베트남, 태국, 캄보디아, 네팔 대표 등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지원림 고려대 교수, 제철웅 한양대 교수, 성승현 전남대 교수, 가정준 외국어대 교수, 최봉경 서울대 교수, 전대규 판사, 안태용 변호사 등이 한국 측에서 참여했고, 그 외에도 백태승, 김동훈, 명순구, 김대정, 임건면, 이상영, 김성수, 안법영, 김재형, 이준형, 서희석 등 여러 교수가 연구논문을 내주는 등 함께 애쓰고 있습니다.”
한중일민상법통일연구소를 처음 설립했을 당시 큰 관심을 얻지 못했지만 서울대학교 법학연구소 및 한국민사법학회의 공조로 여러 차례의 아시아 민상법 통일을 위한 국제학술회의를 주재할 수 있었고 이들을 정리한 잡지 ‘아시아민상법학(영문명 ‘Asia Private Law Review’)을 연 2회 발행해오고 있다.
정부 차원의 지원도 없이 학자들이 모여 이만한 작업을 해내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아시아는 EU 같은 공동체가 없어 시기상조라는 동료 학자들의 생각을 설득하는 것부터 영어로 회의 진행하고 조문을 만들어내는 일, 자국법을 반영하고자 하는 학자들의 근시안적 주장을 기분 상하지 않게 정리하는 일 등 쉬운 일이 하나도 없을 게 불문가지.
“일본은 동남아시아에서 강력한 입법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캄보디아는 민법이 제정되지 않았고 초안만 나온 상태인데 일본이 적극적으로 민법 제정 작업을 돕고 있습니다. 네팔 법무부가 2010년 펴낸 ‘민법 및 민사소송법 보고서’를 보면 게이오 대학의 히로시 마쓰오 교수가 고문 단장의 자격으로 서문을 쓰고 있고, 그 외에 그의 ‘네팔 민법의 기능’이라는 글이 실려 있습니다.”
이 정도로 법률문화 영향력 행사를 위한 일본의 노력은 대단하다. 이러니 중국에선 반발하기 마련이고 자연히 한국이 중재역할을 맡게 된다. 이영준 변호사는 나이도 가장 많고 독일에서 6년, 미국에서 2년을 공부해 근시안적 주장을 적절히 제어하고 대의를 따르도록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다. 1년에 몇 번씩 각국 학자들이 모여서 논의하는 프로젝트가 10회에 이르렀고 지금 서서히 완결단계로 가고 있다. 올해 3월 도쿄에서 열린 회의에서 채무불이행 전체조항이 통과됐고 영국 옥스퍼드 대학 출판사에서 출판을 맡기로 협의 중이다. 이로써 계약의 일반규정, 계약의 성립, 효력, 이행, 채무불이행 등 계약법 초안이 일응 완결된 셈이다.
아시아가 통일 계약법을 가지게 되면 세계 통일계약법 마련에 나설 참.
“저는 아시아계약법 통일을 위하여 삼단계통일론을 주장하는데요, 먼저 거래 관행을 조사하는 겁니다. 무역 계약서 등 관련 서류들을 검토하고 각국의 판례, 조문들을 분석해 각 상품 유형별로 표준계약서를 만들어 그 사용을 권장하자는 겁니다. 이것이 1단계입니다.
KOTRA 및 무역협회에서 자료를 받아 분석해보니 한중일 등 아시아 각국 법의식의 표준화가 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공통점의 최대공약수를 추출하고 아시아의 고유한 거래관행을 발견해 이를 추상화하여 조문화하는 겁니다. 그게 2단계에요. 이에 기초하여 아시아계약법원칙을 초안하고 이것을 각국의 변호사협회, 상공회의소 등 전문가단체, 법과대학 및 연구소 등에 보내 피드백을 받고 분석해 수용한 후 각국 정부의 의견을 반영하여 초안을 최종 손질하는 겁니다. 이 초안이 조약으로 비준, 정착하는 것이 3단계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아시아계약법의 통일을 이룰 겁니다.”
목표가 있고 그 목표를 향해 매진하는 모습은 20~30대가 부럽지 않다. 그간의 연구성과를 열심히 설명하고 아시아계약법, 나아가 세계계약법의 통일을 확신하는 모습을 보니 그에겐 지금이 전성기가 아닌가 싶다.
평범한 판사의 길 대신 학자의 길을 택한 이유는 뭘까?
“김증한 교수님과 곽윤직 교수님이 저를 참 아껴주셨고 저에게 모교 교수로 남을 기회를 주셨었지요. 김증한 교수님은 제가 맡고 있던 학생 동아리 모임 ‘민사법학회’의 지도 교수로서 그때부터 평생 저에게 많은 지도를 주셨어요. 곽윤직 교수님은 법대 2학년 재학시절에 서양 법제사를 강의하셨는데 하루는 강의 도중 갑자기 ‘이영준이 누구냐? 일어나보라’고 하시더니 이번 시험 성적이 제일 좋다며 칭찬해주셨죠. 재학 중에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해 판사생활을 하다가 1965년 독일 프랑크푸르트대로 유학해 하자담보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1969년 귀국해 다시 판사에 복직했죠.”
“왜 학계로 가지 않고 판사가 되셨어요?”
“당시 시대적 특수성에 따라 교수는 학생들의 데모를 막는데 밀려 연구할 시간이 없었지요. 교수로 가는 것을 뒤로 미루었던 것입니다.”
사실 대개의 수험생이 궁금해했던 것은 치열한 논쟁을 벌인 당사자간 실제 사이는 어떨까 하는 것이다. 다른 생각만큼이나 감정이 쌓여 사이가 나쁘지 않을까 하는 것.
“전혀 그렇지 않아요. 곽윤직 선생님 댁에는 늘 새해인사를 가곤 했으니까요. 약주도 많이 주시고요. 곽윤직 선생님이 김재형 교수와 공저로 책을 내시는 것을 보면 훌륭히 제자를 키워내시는 것이 부럽기도 하고요. 선생님께서 더욱 장수하시길 빕니다.”
그가 판사를 하면서 공부와 강의를 게을리하지 않은 것은 독일에서는 민법 교수와 민사 판사는 겸직이 가능하고 더 좋은 재판을 위해 공부하는 것이어서 당당하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승진하는 것은 재판만 열심히 해온 법관들의 몫이라는 생각이 어느샌가 들더라고.
“당시에는 판사로 유학 다녀오는 게 쉬웠나요?”
“그럴리가요. 1965년에 독일로 유학을 다녀오겠다고 했더니 조진만 대법원장님이 ‘뭐 하러 독일 가나. 여기서 독일책 구해 읽으면 되지’ 하시며 유학자체를 막으시다가 나중엔 1년만 다녀오는 것으로 약조하고 보내주셨어요. 근데, 어디 그게 1년하고 되나요. 결국 사표를 우송했지요.”
돌아와서 판사로 복위, 1991년 의정부지원장을 마지막으로 변호사로 개업해 변호사로서도 23년째. 결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열심히 변호사 업무를 해왔다. 경제적인 성공도 이뤘다. 강의하고 저술활동을 꾸준히 하면서도 성실히 업무를 해왔다.
딸 다섯 막내아들 하나인 그는 그 부분이 특히 행복하다며 미소지었다. 맏사위인 최익석 변호사는 검사출신으로 지금은 함께 사무실을 하며 이영준 변호사가 집필과 연구를 할 수 있게 돕고 있다. 둘째사위는 외교관으로 사우디아라비아에 공사로 가 있고 셋째사위는 미국유학 중, 넷째사위는 삼성 연구원, 다섯째사위는 북부지원 판사로 있다. 막내딸은 동국대 법대 교수로 아버지의 뜻을 잇고 있고 막내 아들은 CJ에 다닌다.
“너무 건강해 보이세요. 무슨 운동하세요?”
“등산이 제일 좋아요. 대학 동기인 김승진 변호사의 권유로 영세를 받았는데 그들과 함께 청계산 옥녀봉을 오르는 게 큰 낙입니다.”
좋은 인간관계는 행복한 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부분이다. 그의 편안한 미소는 단순하면서도 행복한 생활에서 나오는 것 같다. 사진을 찍고 있던 홍보과 직원이 불편할까 계속 걱정하며 여직원이 내온 과일을 포크로 찍어 건네는 배려가 따뜻했다. 대화내용을 적는 것이 힘들까봐 천천히 말하며 잔신경을 계속 쓰는 모습이 그의 성품을 느끼게 했다. 누구라도 불편해하는 걸 못견뎌하는 모습에서 진정한 대가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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