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변협, 일변연 손잡고 일제피해자 피해회복 나서야”

“제 아이디가 독립군이잖아요. 아내한테 매번 그래요. 독립운동 하시던 분들은 36년 동안 죽을 각오로 일하셨고 실제로 고문과 투옥을 겪고, 생명을 잃으셨잖아요. 이거 가지고 힘들다고 하면 천벌 받는다, 그럽니다.”
대한변협 일제피해자지원특별위원회 회의 참석차 대구에서 올라온 최봉태 변호사를 붙잡고 인터뷰하며 20년 가까이 돈 안 되는 일 하는 거, 집에서 뭐라 그러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이다.
최봉태 변호사(51).
2012년 5월 24일 역사적인 대법원 판결이 선고된 이후 언론에 많이 등장한 변호사다. 독립운동을 한다는 각오로 일제피해자들의 권리회복을 위해 일한 지 20여년. 하나씩 결실을 맺어가고 있다.
“어떻게 일제피해자 권리회복 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됐어요?”
“제가 1994년부터 1997년까지 도쿄대에서 노동법을 공부했어요. 유학 가서 보니 일본변호사들이 징용 한인 배상을 위해 헌신적으로 재판에 임하는 걸 보고 너무 부끄럽고 반성이 됐어요.”
한번 부끄럽게 여기고 참여하기는 어렵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반성으로 수십년을 한결같이 헌신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려움이라면 ‘시간과의 싸움’이라는 겁니다. 위안부 할머니는 이제 60여분 남아계시고 강제동원 피해자 분들도 많이 돌아가셨어요. 국가가 힘이 없어 그렇게 끔찍한 일을 당했고 전쟁이 끝났는데도 가해자로부터 어떤 사죄와 배상도 받지 못했는데 이게 어떻게 독립인가요? 그분들의 상처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상처 속에서 한분씩 돌아가시고 있는 게 안타깝습니다. 유족이 이어받으면 되지 않느냐고 하실지 모르지만 생업이 있는 유족들에게 불확실한 싸움에 매달리라고 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대법원이 일본 기업에 일제피해자 배상책임이 있다고 판결하기까지는 숱한 사람들의 기여가 있었다. 먼저 대한변호사협회 일제피해자인권특별위원회 변호사들. 정인봉·이수경·김호철·장완익·김진국·양정숙·이상갑·이명숙·정재훈 변호사 등이 음으로 양으로 일제피해자 피해회복을 위해 고생해왔다. 최 변호사를 비롯해 돈 한푼 안 받고 오랜 세월을 매달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에도 묵묵히 해온 많은 변호사들이다.
일본에서는 미쓰비시중공업 피해자소송을 담당했던 아다치 슈이치 변호사, 자이마 히데카즈 변호사가 1심에서 패소한 뒤 한국법원을 믿어보자며 소송을 내자고 했다.
그리고 일본변호사연합회. 2010년 12월 세계인권선언의 날에 대한변호사협회와 일본변호사연합회는 공동으로 “일본 식민지 지배하 한국민에 대한 인권침해, 특히 아시아태평양전쟁 당시의 인권침해 피해가 회복되지 않고 방치되어 있다”며 “그 피해회복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 역사적인 공동선언 이후로 헌법재판소의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가의 부작위위헌 결정, 대법원 미쓰비시배상책임 판결이 나왔다.
“저는 대법원 판결이 대한변협과 일변연의 공동선언을 계기로 나왔다고 생각해요. 양국의 변호사단체, 법률가들이 한일청구권협정은 개인청구권과는 상관없으며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책임을 기업, 정부가 져야한다고 천명함으로써 법적 정당성을 확인한 것입니다. 2010년, 나라를 빼앗긴 지 100년이 지나 양국 변호사들이 모여 강제침탈이 부당했음을 확인한 공동선언은 정말 역사적 의미가 큽니다. 감정적으로 토해내는 게 아니라 법률가들이 논리적이고 법리적으로 부당함을 말하고 해결책을 제시한 겁니다. 이제 대한변협과 일변연이 나서야 할 때입니다. 대법원 판결이 실질적으로 힘을 가지고 일제피해자들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단계로까지 만들어 가야 합니다.”
공동선언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질 수 없는 일. 양국의 변호사들이 숱하게 오가며 논의하고 문안을 다듬어왔다. 최 변호사는 일변연에서 그 실무를 담당해온 아이타니 구니오 변호사에게 고맙다는 말을 써 달라고 했다. 누구도 예상 못했던, 일본 최고의 법률가단체(우리나라처럼 일본도 변호사연합회에 강제가입해야 한다)에서 전후보상책임을 천명할 수 있었던 것은 역사의식이 투철한, 양심 있는 변호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양국 변호사들이 이번 대법원 판결을 계기로 정부, 기업이 함께하는 일제피해자지원재단을 만들어야 합니다. 공동선언에서도 지적했다시피 재단을 만들어 일괄보상이 가능하도록 해야 합니다. 전후 독일이 재단에 출연, 피해자 보상은 물론 평화교육을 하도록 한 점을 교훈삼아 신속한 피해구제가 가능한 재단을 만들어야합니다. 일제피해자들이 사법적 구제를 받지 못하고 돌아가신 배경에는 한일청구권협정을 맺은 우리 정부와 그 후 일본에서 들여온 자금을 사용해 성장한 한국기업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청구권자금을 사용한 기업이 제대로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돈을 내고 싶어도 주주들의 동의를 얻어야 할뿐더러, 피해자에 대한 포괄적 해결이 되어야 하는데 그에 대한 법적 안정성이 보장돼야 한다. 세제지원 등 정부의 협조도 필수적이다. 그런 법적 안정성을 보장하려면 양국의 변호사들이 만들어낸 재단을 통해 해결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일본 기업이 추가적으로 개별 당사자가 내는 소송에 일일이 대응하는 것도 힘들 것이고 배상도 힘들게 된다. 그래서 일본 정부 및 기업, 한국 정부 및 기업으로 ‘2+2’재단을 만들어 새로운 평화공동체를 만들자는 것이다.
“저는 양국 변호사단체가 발 벗고 나서 일제피해자 권리회복을 위한 재단을 만들어 동아시아 평화에 기여하는 모습은 노벨평화상 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최봉태 변호사가 열심히 설명하고 강조하는 모습을 대하니 꿈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일제가 남긴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양국 변호사가 손잡고 나서는 일은 20년 교류해온 한·일 변호사협회라면 가능한 일이다.
“당사자들은 고등법원에서 판결을 받아 직접 손해배상을 받고 싶어하지 않을까요?”
“개개 당사자가 판결 받아 배상받기는 힘듭니다. 브로커들이 날뛸 가능성도 크고요. 판결 이전에 합의로 재단을 설립해야 합니다. 일제피해자분들은 변호사협회 일제피해자 특위에 피해사실을 신고하고 일괄적으로 조율해 구제받는 것이 신속하고 확실한 길입니다. 그래서 재단을 만들자고 하는 거고요. 포스코의 매출액 1%만 기부받아도 6800억입니다. 일본정부로부터 찾아와야 할 공탁금만 해도 10조원입니다. 기업들이 노동의 대가로 지불하라며 정부에 공탁해 놓은 돈입니다. 이 돈을 피해자 보상과 동아시아 평화를 위해 써야합니다.”
일제피해자 배상 판결이 나오고 이제 필요한 것은 끈기 있게 실질적 배상으로 이어지게 만드는 힘이다. 지혜와 연대의 힘으로 대한변협과 일변연 변호사들이 성과를 만들어 가야 한다.
“고시공부가 머리로 하는 게 아니잖아요? 엉덩이 힘으로 하는 거죠”라며 소탈하게 웃는 최봉태 변호사를 보니 마음이 놓인다. 그의 끈기라면 해낼 것이다.
2주 전 변협이 만난 사람 인터뷰 인물은 김갑유 변호사였다. 김 변호사와 최 변호사는 대학동기이다. 어찌보면 상반된 이미지다. 국제중재전문으로 세련된 화술, 언변의 김갑유 변호사와 시골아저씨 같은 소탈함에 사람좋은 웃음의 최봉태 변호사를 연이어 인터뷰하면서 ‘이들이 하고 있는 게 애국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거창한 거대담론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사람에 대한 관심, 사랑, 특히 우리나라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는 변호사들이다. 각자의 방식으로 열심히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변호사들.
“서울에서 변호사 하는 동기들과 경제적인 격차가 많이 벌어졌어요. 십수년 전만 해도 이렇게까지는 아니었는데 말이죠. 제가 반골기질이 있어선지 서울서 개업하는 게 내키지 않았어요. 뭐든지 중앙, 서울에 집중되는 것이 싫어요. 지방도 행복할 수 있도록 권한이 나눠져야 합니다. 나눌수록 행복한 거예요.”
그는 대구에서 ‘삼일’ 법무법인을 뜻을 함께하는 지인들과 만들었다. 3·1 운동 정신을 이어받자는 의미로 이름을 지었다. 일본으로 유학을 갈 때도 회사가 여유가 있어서 간 것이 아니었다. 빚을 내 유학을 보내고 함께 일해서 갚아나간 것이다. 그의 웃음에는 이렇게 동료를 믿고 동료들이 대의를 위해 배려해주는 것에 대해 감사가 담긴 것이다.
“미쓰비시의 대리인이 김앤장이고 일제피해자 대리를 제가 맡았다고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고들 했잖아요? 왜 제가 다윗이에요? 골리앗이지. 삼일이 더 따뜻한 연대로 뭉치고 변호사들을 대우하는, 힘이 큰 골리앗이에요.”
그의 말이 맞다. 마음으로 뭉치고 연대하는 이들의 힘이 견고하게 법의 논리로 무장했던 사법부를 흔들고 일제피해자에게 배상하라는 판결을 이끌어냈으니.
“자꾸 일본 사법부가 배상책임이 없다고 발뺌한 것으로 보도해 우리 대법원 판결 의미를 설명하는데 그건 아니에요. 2007년 4월 일본최고재판소는 분명히 ‘개인청구권은 살아있다’고 설시했어요. 한국과 일본의 법치주의가 이 정도로 성숙한 거죠. 이제는 한·일 법조가 손을 맞잡고 과거를 제대로 딛고 평화체제를 만들어갈 때에요.”
이제 문제는 후속조치다.
국무총리 산하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조사위원회’와 함께 재단설립 등을 논의하고 청구권자금을 받은 코레일, 한전 등 10여개 기업들에 공문을 보내 참여를 촉구하고 있다. 이들 기업이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정부의 조치도 필요하다. 우리 기업과 정부가 무관심하면서 일본을 비난할 수는 없는 일. 대한변협도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재단이 만들어지면 젊은 변호사들이 할 일이 무척 많다. 희생자들의 신청과 심사, 교섭과 보상까지.
“저는 돈, 명예, 권력이 삼권분립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시합격이라는 명예를 얻었으면 돈과 권력은 포기해야 맞습니다. 사회적 명예, 법률적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자격을 얻었으니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명예에 걸맞게 살아야죠. 그야말로 ‘가치있는 삼권분립’입니다. 변호사로 명예와 돈을 추구하고 정계로 가 권력까지 갖고 싶어 욕심을 내다 문제를 일으키는 걸 많이 봤습니다. 다 가지려고 무리하니 사회적 지탄을 받는 거죠. 우리가 고시공부를 시작할 때의 마음이 ‘돈 벌겠다’였나요? 저는 학교다닐 때 시대적 아픔을 외면하고 도서관에 처박혀 공부한 부채의식이 있어요. 떳떳한 삶을 살지 못했다는 부채의식이 있어서 변호사가 되고 나서야 조금이라도 빚을 덜고자 이 일에 매달리게 된 겁니다.”
대구에서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의 모임’을 통해 위안부 할머니들과 20여년을 함께해왔다.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둔 최 변호사는 집에선 완전히 빵점아빠다. 아내에겐 “독립군은 집안을 쑥대밭 만들었는데 난 죽지는 않지 않냐”고 큰소리친다는 경상도 남자.
“저는 시민들이 모여 바람직한 공동체를 형성하는 걸 꿈꿉니다. 우리 국민은 국민의 일을 하는 심부름꾼인 대통령, 국회의원에 과도하게 관심이 경도돼 있어요. 주인이 주인대접을 못 받는거죠. ‘공동체의 주인되어보기 운동’이라고 말하는데요. 우리는 ‘이렇게 서로를 도우며 살자’라는 헌법을 만들어보는 겁니다. 제가 대구에서 ‘대구헌법을 만들자’고 운동을 하는데, 예를 들어 제8조 제5항은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게 내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 공동체는 어떻게 운영할까 고민하며 헌법을 만들어 보는 겁니다. 그런 고민을 하다보면 더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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