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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사업 전문가 강지원 변호사“인생 2막은 나눔의 축제, 봉사하며 살아요”
대한변협신문  |  news@koreanbar.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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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호] 승인 2012.06.11  15: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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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원 변호사와 처음 만난 곳은 서울 종로구 창전동 ‘타고난 적성찾기 국민운동본부’ 회의실이었다. 계속 사람들이 드나들어 인터뷰 진행이 어렵자 버스 한정류장 정도 거리의 ‘푸르메재단’으로 갔다. 장애인을 위한 각종 시설이 있는 ‘푸르메재단’의 푸르메치과 진료소 앞에서 인터뷰를 이어서 진행했다.
“저 이렇게 살아요. 각 사회단체들 순례하면서. 아시다시피 제가 청소년보호운동을 해왔잖아요. 청소년들이 불행한 이유가 자기의 적성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적성찾기’ 운동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청소년의 10분의 1이 장애인이고, 이들이 더 힘들게 살고 있어서 장애인 운동을 하게 됐어요.”
그의 관심, 그의 사회참여는 그렇게 계속 진화하고 있었다.
강지원 변호사(63).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변호사 중 하나다. 전문분야는 사회봉사. 봉사와 헌신 분야에서 우리나라 최고상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변호사다.
“시대정신이 무언가 고민해봤어요. 우리 국민들이 행복하지 못하고, 자살률이 너무 높고, ‘꿈을 잃어버린 이유가 뭔가’ 그런 것들이요. 꿈이 무엇이어야 하나, 어디서 찾아야 하나 이런 고민들 계속하다 국민적 멘토링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냈어요. 좋은 대학, 취직, 돈 많이 버는 직업…이런 게 꿈이긴 하지만 궁극적 꿈은 아니잖아요. 법조인이 한해 2500명이 배출되는데 이들이 판·검사가 되면 꿈을 이룬 걸까요? 우리는 왜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을 저당 잡아 불행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나요? 꿈을 이루는 과정도 행복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의 고민은 구구절절 옳은 말이다. 그러나 모범생으로만 살아온 법조인에게서 듣는 이런 말들은 사치스럽게도, 허황된 소리로도 들린다. 그렇게 염원하던 판·검사, 변호사까지 다 해봤으니 꿈을 이룬 것 아닌가, 행복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는 경기중·고, 서울대를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수석합격해 검사의 길을 걸었다. 행시에 먼저 합격해 부산세관에서 근무하다 사시에 도전했다. 알려져 있다시피 그의 아내는 김영란 국가권익위원회 위원장(前 대법관)이다. 우리 사회가 세팅해 놓은 기준에 따르면 별다른 일탈이 없는 한 부와 권력을 누리며 살 수 있는 조건에서 살아왔다.
“판사, 검사가 된다고 다 행복한 건 아닙니다. 저나 아내나 적성은 다른 데 있으면서 법조인이 됐습니다. 자꾸만 아쉬움이 남고 뒤를 돌아보게 됐어요. 사법시험 수석합격하고 연수원 성적까지 합산해서 1등이었는데도 서울이 아닌 전주로 발령났어요. 발령거부하고 기자회견하겠다며 부당함을 따졌더니 제 학생운동 전력이 문제가 됐다는 겁니다. 중앙정보부에서 통지가 와서 어쩔 수 없으니 1년만 참으라더군요. 결국 전주지검으로 내려갔는데 첫 사건이 소년사범이었어요.”
운명이었다. 나쁜 일도 돌이켜 보면 좋은 일이 될 수 있는 것을 그때 알았다. 수갑을 차고 들어오는 ‘비행청소년’은 한때 실수를 했을 뿐인 그저 ‘평범한 아이’였다. 뭔가 불량한 유전자를 가진 아이들일 거라는 선입견이 하나하나 깨어지고 심리학, 정신분석학, 카운슬링 책들을 탐독하며 이들 실수한 아이들이 제자리를 찾고 행복해지는 길을 ‘함께’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의 ‘일탈’은 시작됐다.
그는 검사가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는 잘나간다는 승진인사 코스를 거부했다. 지청장, 검사장을 마다하고 남들이 꺼려하는 법무연수원, 사법연수원, 서울고검 등 청소년보호·연구를 계속할 수 있는 한직을 찾아다녔다. 그때부터였다. 그에게 ‘별난 검사’라는 딱지가 붙은 것은.
“남의 시선, 평가를 의식하고 눈치 보느라 실제로는 내 행복이 없는 생활, 정말 의미 없고 불행한 겁니다. 후배들에게 얘기합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타고난 적성을 찾아라. 그래야 행복하고 진정한 성공을 이룰 수 있다고.”
그의 이런 행보는 법조인으로서의 정상적인 삶을 벗어난 것이었고 청소년 보호에 도움이 될까 해서 나선 방송일로도 ‘네가 연예인이냐’는 비아냥을 숱하게 들었다.
“저는 원래가 글 쓰는 걸 좋아하고 토론하는 걸 좋아했어요. 중학교 때는 방송반을 했었고요. 청소년기에 사회문제와 인간 내면의 문제에 대해 고민이 많았고, 음악은 좋아했지만 프로가 되기엔 부족했어요. 그중에서도 말 잘하고, 글 잘 쓰는 재능이 쓸 만했는데, 쓸데없이 돌아서 온 거죠. 누구나 재능은 하나가 아니고 여러 개입니다. 그런 재능들을 일찍 발견해 이것저것 해보고 그 재능들을 조화롭게 섞어서 사용할 수 있는 직업을 갖는다면 더없이 행복할 겁니다. 예를 들어 과학자가 될 만큼 분석적이고 연구에 재능이 있는데 음악에도 재능이 있으면 악기제조 기술이나 음악이론 연구를 할 수 있죠. 자신의 재능이 무엇인지 찾아내고 그걸 하면서 살아야 행복해요.”
‘재능을 살리자’ ‘학벌은 중요하지 않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실제 자녀교육은 어떻게 하는지 궁금하기 마련.
“그렇죠. 제가 학벌이 중요한 게 아니라 적성이 중요하다고 말했으니, 당연히 물어보셔야죠. 자식들 어디 보냈느냐고요? 네, 딸이 둘인데 둘다 대안학교에 보냈습니다. 수능거부로 취재대상이 되기도 했지요. 이런 문제는 아내가 동의해줬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지요.”
큰딸은 미국과 일본에서 공부를 마치고 미디어아트와 광고업무를 하고 있고, 대안학교 1기생으로 졸업한 둘째는 현재 영화촬영 현장을 누비고 있다.
“부모로서 부모가 원하는 길을 강요하지 않고 하고 싶은 분야를 스스로 찾아가게 한 것, 그거 하나는 잘했다고 믿습니다. 자기 인생은 자기가 사는 것입니다.”
그는 소년사범들을 접하고 보호관찰소장이 되면서 본격적인 ‘적성’을 찾게 된다. 서울지검 공안부에 있을 때였다. 정치적 사건으로 계속 윗선과 부딪치다가 한직인 공판부로 가게 됐다. 공판부에서 겸직한 일이 서울보호관찰소장.
한번은 비행청소년 30여명을 데리고 중증장애인 시설인 ‘라파엘의 집’을 찾았다. 비행청소년들이 장애인들이 수영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사회봉사명령’으로 하게 한 것이었다. 아이들이 장애인들에게 신경질이라도 부리면 어떡하나 마음 졸이던 것도 잠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한 아이 예외없이 지극 정성으로 장애인들을 돌보는 것이었다. 후에 아이들로부터 “저 분들은 온몸이 불편한데도 그렇게 해맑은데 나는 사지 멀쩡한데도 심보가 이렇게 뒤틀렸나 반성하게 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서울보호관찰소장을 마친 후 또다른 한직인 법무연수원을 자청해 청소년 문제연구를 했다. 2년 후에는 법무부 관찰과장으로 비행청소년 보호관찰을 관장했다. 사법연수원 교수를 거친 후에는 서울고검 검사자리를 자청하는 등 하도 이례적인 행보가 많아 자주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YS정부 마지막 해에 ‘청소년보호위원회’가 신설됐고, 초대 위원장으로 초빙됐다. 청소년 대상 술·담배 판매금지, 청소년 유흥업소 고용금지, 청소년상대 성매수자 신상공개 등등 당시로선 획기적인 조치들을 해나갔다. 4년 임기 중 3년을 마쳤을 때 청소년 업무를 ‘육성’과 ‘보호’로 2분화하지 말고 통합하자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의를 표하고 서울고검으로 되돌아왔다. 돌아와서도 서울고검에 계속 남기를 자청해 화제를 모았으며 몇 년 후 검찰을 떠났다.
사표를 낼 당시 “청와대에 유착하고, 줄 대고, 눈치 보는 검사가 검찰 내부의 3적(敵)이고, 이들이 검찰을 망쳐놓았다”고 일갈했다. 나갈 때 몸 담았던 조직에 이렇게 쓴소리를 한 대가로 그는 전관예우라는 특혜를 스스로 날려버렸다. 하지만 검찰이 그의 외침에 귀 기울이고 반성할 줄 아는 조직이었다면 오늘날 이렇게 국민의 지탄을 받는 조직이 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후배검사들을 비판하는 제 맘은 편하겠습니까? 욕 먹더라도 소리 내고 문제제기를 하지 않으면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변호사가 되고 나서도 일일 라디오시사프로그램 진행자가 됐고, 2004년 3월부터는 TV토크쇼까지 진행해 하루에 방송만 두 탕씩 뛰는 방송인으로 살았다.
2004년 8월 그의 아내가 여성 최초 대법관에 임명됐다.
“당시 진행하던 정치시사프로그램을 중단했을 뿐 아니라 정치현안에 대한 발언이나 정치권과의 접촉도 일절 자제했습니다. 그건 차라리 쉬운 일이었어요. 평소 잘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 돈봉투를 들고 와 아내가 주심인 사건을 청탁할 때는 정말 힘들더군요. 우리 사회의 청탁문화를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심지어 지인 변호사까지 ‘우리끼리만 알고 있자, 선임계 내지 말고 사실상 수임해 달라’고 하더군요. 그들이 마음 상하지 않게 거절하는 게 정말 어려웠습니다. 지금도 어쩌다 마주치면 얼굴까지 돌려버리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때 겪은 청탁문화의 폐해로 국민권익위원회가 ‘부정청탁방지법’을 추진하는 거라며 웃었다. 공직자들이 청탁을 받는다고 모두 흔들리진 않는다. 그러나 수많은 청탁이 공직자를 괴롭힌다. 소신껏 일할 수 있도록, 청탁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2008년 말에는 아예 서초동에 있던 사무실 문을 닫았다. 몇 달동안 사당역 근처에 개인사무실을 내고 변호사 간판도 없이 잔무를 처리했다. 곧 공식적 폐업신고를 내고 개인사무실도 없앴다.
이제 그의 본업은 어린이·청소년 사업이다. 청소년 사업을 하다 보니 청소년의 절반은 여자아이들인데 더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성폭력의 대상이 된다거나 성매매 착취의 대상이 되는 것.
이래저래 여성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고 여성운동을 지원하게 됐다. 성매매여성들이 업주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을 대리하고 밀양 성폭행 피해 청소년을 대리해 가해자와 무턱대고 대질신문을 시키고 막말을 퍼부은 경찰을 고발하기도 했다. 세상에는 분노할 일이 너무 많았다.
특별한 계획이 있었던 게 아니라 필요로 하는 곳에 참여하다 보면 또 새 길이 열리는 식이었다. 청소년, 여성문제를 제도적으로 해결할 방법을 고민하다 ‘매니페스토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2006년부터 7년째 정치개혁운동으로 정책선거를 하자는 것이 매니페스토 운동.
“그동안의 폐해였던 돈선거, 조직선거, 부정선거, 지역감정 선거, 연고선거의 폐단을 어떻게 고칠 것인가 해서 나온 것입니다. 선의의 정책선거를 유도하자는 것이지요. 정책공약들이 과연 실현가능성이 있는 것인지, 당선되면 지키는지 감시하자는 운동이죠. 7년째 해오고 있지만 과연 성과가 있는 건지 착잡하기만 합니다. 한알의 밀알이라도 심는 것이 안 심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요?”
그의 봉사인생의 한 갈래가 된 매니페스토 운동. 차라리 직접 정치를 하는 게 낫지 않으냐고 했더니 단호하다. “정치요? 적성에 안 맞아서 안 합니다.”
부패, 기만, 당파, 군림하는 정치에는 절대 발을 담글 수 없다는 것. 사실 그는 30년 전부터 정치권의 숱한 러브콜을 받아왔다. 적성에 안 맞는 일을 할 수 없다는 단호함과 봉사가 적성인 그의 궤적에서 ‘매니페스토 운동’이 나온 것이다.
“인생 1막이 먹고 사는 돈벌이에 치중하는 것이었다면 인생 2막은 ‘나눔의 축제’로 살자, 생각했어요. 변호사 사무실도 정리하고 차도 팔고, 집도 시골에다 구하고… 아, 그런데 아내가 권익위원회에 간 거예요. 출근에 2시간이 넘게 걸려서 어쩔 수 없이 북촌에 월셋집을 구했어요.”
나이 예순을 앞두고 고민이 많았다는 강지원 변호사는 앞으로 돈을 번다면 결국 자식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돈을 버는 게 아닌가, 자식에게 남겨주기 위해 힘들게 돈벌이를 하는 것은 자식의 재능과 에너지를 위해 올바른 일이 아니다, 라고 결론을 내고 돈벌이를 목적으로 하는 일은 정리했다. 감투를 탐내는 일이나 명성이나 인기를 좇는 일도 포기했다.
‘따라하기 너무 어려워 보인다’고 하자 그가 산뜻하게 정리해 주었다.
“지금 하는 일에서 조금씩만 더 하면 돼요. 봉사의 연습이죠. 붕어빵을 파는 할머니가 배고파 보이는 어린이에게 붕어빵 하나 건네는 마음입니다. 인생 1막, 돈벌이에 치여 살더라도 사건 10건 할 때 1건은 무료변론을 하자, 이렇게요. 그렇게 하다보면 누구나 봉사의 달인이 될 수 있습니다.”
변호사 시절 그의 공익활동보고서엔 무료변론 시간이 300시간이 넘었다.
“최근엔 젊은 변호사들이 힘없고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한 변론에 나서고 공익로펌을 만들더군요. 정말 고마운 일입니다. 우리 법조계는 변화를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러면 사회에서 뒤처지기 마련입니다. 대법원도, 헌법재판소도 좀 더 다양한 목소리를 듣고 담아내야 하는데 들으려고 하질 않는 것 같아요. 출세주의자들의 욕망, 탐욕에 휩쓸리지 말고 내려놓자, 비우자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회도 발전하고 법조계도 제 기능을 할 수 있습니다.”
강지원 변호사는 현재 정치개혁을 위한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상임대표, 교육개혁을 위한 ‘타고난적성찾기 국민실천본부’ 상임대표, 장애인을 위한 ‘푸르메재단’ 대표, 평생봉사를 위한 ‘생애봉사연구소’ 대표 등을 맡아 다양한 사회운동을 벌이고 있다. 그가 뿌리는 다양한 봉사의 씨앗이 우리 사회를 좀 더 살 만한 사회로 만들어줄 것이라 믿으며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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