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봄이 정취를 누려볼 사이도 없이 후다닥 달려가 버렸다. 모든 꽃이 동시에 개화하는 극지방의 여름처럼 목련을 기다렸다 차례로 벚꽃이 피는 예의가 없었다. 그만큼 꽃들도 빨리 시들어 버려 눈은 너무나 아쉽지만, 반면에 봄철에 꽃가루 알레르기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는 짧고 편한 봄이 되었다. 황사도 예년보다는 심하지 않고 드물어서 호흡기 질환 환자도 적었다. 이만하면 건강한 봄이라 할 만하지만, 반면에 의사들에게는 아마 너무나 한적한 불경기의 봄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이상기후에 대한 걱정을 빼놓으면 그런대로 잘 지나가고 있다.
날씨도 맑은 어느 날 춘풍이 불 듯이 친구 내외가 왔다. 까탈스런 신랑 모시고 사느라 피곤하지만 그래도 해외출장이 잦아 살 만하다며 우스갯소리를 하는데, 틀림없이 남편이 걱정되어 동반한 것이다.
그녀의 남편인 김 사장은 만성적인 위장장애를 가지고 있다. 초음파나 내시경 소견상으로 심한 위염 혹은 위궤양과 같은 모습은 보이지도 않으면서 늘 뱃속이 더부룩하다거다 통증이 있거나 혹은 신물이 넘어오거나 하는 증상을 호소한다. 말하자면 기능적인 위장장애를 가진 환자이다.
또 전형적인 소음인 체형과 성정을 지녔다. 소음인의 경우 단아한 체구가 많고 키가 크더라도 흉곽이 좁고 길게 발달하여서 위장이 튼튼하게 자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평생을 두고 오장육부(五臟六腑) 중에 소화기가 약해 소화장애, 복통, 설사 등으로 고생하게 된다.
소음인의 성격은 꼼꼼하고 정확해서 재무분석이나 회계와 같은 일을 잘 처리한다. 친구의 남편이 무역업으로 성공한 데에는 그의 이런 꼼꼼한 성격이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반면에 친구는 활달하고 진취적인 소양인 성향을 가졌다. 소양인의 경우 앞장서서 일을 도모하거나, 모임을 주도하는 것을 좋아하고 마음먹은 일을 늦추는 법이 없다. 어깨와 흉격의 발달이 좋지만 안으로 열이 쌓이기 쉽기 때문에 그로 인한 질병에 노출되기 쉽다.
아마도 이 부부가 싸운다면 분명히 싸움을 먼저 거는 쪽은 친구일 것이고 남편은 순간 참아내지만 결국은 승리(?)할 것이다.
친구 남편의 잦은 출장은 약한 소화기를 더욱 약하게 만드는 작용을 했다. 이런 사람은 하룻밤만 새도 속이 쓰려할 판인데 시차가 자주 바뀜에 따라서 위장은 더욱 고단해졌고 가뜩이나 입이 짧은 사람이 식성에 맞지 않는 음식을 먹어야 하니 소화가 될 리가 없었다. 게다가 하고 다니는 일이 건건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하는 일로 바이어들과 먹는 밥이 정기(精氣)가 될 턱이 없었다. 약을 먹어도 불편한 속 때문에 계속 신경은 날카로워지고 잦은 설사로 기운은 빠졌다.
이렇게 기운이 없다고 하면서 온 김 사장을 처음 봤을 땐 ‘평생 빚을 지고 있는 친구 남편인데 잘해줘야지’하는 생각으로 욕심을 부려 탈을 내고 말았다. 일종의 VIP 신드롬인 셈인데 잘해주려고 하면서 무리수를 두게 되어 결국엔 실패하게 되는 경우였다. 소화기가 약해서 흡수할 힘도 없는 사람에게 보약은 위장만 학대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을 잠시 잊었었다.
그 실패 이후에는 아주 가볍고 기분전환까지 시켜줄 수 있는, 소화에 도움이 되는 약재들로 이루어진 처방을 썼다. 결과가 적중하여 친구 체면은 살려줬지만, 그래도 나에겐 아찔한 기억이다.
점차로 김 사장과 같은 환자들이 많아질 것이다. 몸을 쓰는 일보다는 마음을 쓰는 일이 많아지고 위장에 좋지 않은 음식들은 범람한다. 잠은 짧아지고 업무는 세밀해지고 있다.
이러한 증상들에 곽향이나 소엽과 같은 한약재들을 쓰게 되는데 곽향의 경우 배초향이라고 불리며 차로도 즐길 수가 있다. 소엽은 깻잎과 비슷한 종류여서 깻잎과 같이 향기가 나는 채소류를 음식으로 추천할 수 있다.
몇 해 전부터 스트레스를 풀어버리는 데는 매운 음식이 좋다면서 매운맛이 크게 유행하고 있다. 매운맛은 위장의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트레스를 가중시키는 맛이라고 할 수 있다. 매운 맛은 일종의 아픈 감각과 닿아있다. 우리 몸에 좋다는 전통 한식은 그렇게 거칠고 맹렬한 음식들이 아니다. 담백하고 순수해서 어쩌면 심심하기까지한 지기(地氣)를 그대로 살린 맛이다. 세상 살기가 신산(辛辣)해져서인지 매운맛들이 유행을 하는데, 혹 역으로 입맛을 바꾸어 순한 맛을 즐겨 먹기 시작하면 세상도 좀 순해지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저작권자 © 법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