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가 되면 배낭에 노트북과 책을 챙겨 둘레길 탐방에 나선다. 서울시가 182㎞의 걷는 숲길을 만들어 놓았다.
이제 사무실에서 초조하게 의뢰인을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변호사마다 돈 복이 다 정해져 있었다. 굶지만 않으면 된다. 부자는 하늘이 정해주는 내 소관 밖이니까. 스마트폰과 노트북이 있으면 내가 존재하는 곳이 사무실이다. 언제 어디서도 일을 할 수 있다.
평일의 숲 길은 나의 독차지다. 이렇게 자유롭기 위해 나는 변호사를 선택했다. 비가 살짝 뿌린 날 안개 피어오르는 숲 속에서는 산채냄새가 난다. 산의 정기를 헹구어 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의 영혼이 싱싱하게 되살아난다. 나는 프루스트처럼 조용한 숲 길을 걷는다. 다리가 아프면 숲 속 벤치에 앉아 노트북을 펴든다.
머릿속에서 수많은 이야기가 아우성친다. 간디도 류영모 선생도 많이 걸으라고 했다. 발바닥은 모세혈관이 많이 모인 제2의 두뇌라고 했다. 걸으면 더 좋은 아이디어들이 떠오른다. 글을 쓰다가 다리에 힘이 슬슬 오르면 다시 걷는다. 그냥 걷기 심심하면 이어폰으로 내려받은 성경과 찬송을 들으면서 산길을 간다. 그런 행위가 나의 명상이자 기도이기도 하다.
걷다가 다시 다리가 묵직해지면 그 자리에 앉아 배낭 속에서 읽던 소설을 꺼내 펼친다. 어제는 새로 구입한 미국작가 존 그리샴의 ‘소송사냥꾼’을 읽었다. 변호사는 힘들더라도 자존심을 지켜야 한다고 변호사 출신 작가는 주인공의 입을 통해 말하고 있었다. 지나가다 갑자기 들이닥쳐 상담을 하자는 사람에 대해 한 말이다. 싸구려가 되기 싫은 건 미국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배가 슬슬 고파졌다. 배낭에서 마트에서 산 삼각김밥을 꺼내 한입 베어 먹고 물을 마셨다. 일급호텔에서 고위직의 인물들과 만나 와인과 최고의 요리를 먹는 것보다 훨씬 좋다. 주변에는 아름다운 들꽃들이 색깔들을 뽐내며 피어있다.
맑은 새소리가 낮게 퍼져 나갔다가 멀리서 되돌아온다. 이게 내가 만나는 조촐한 천국이다. 그러나 숲 길에도 유혹이 있다. 걷다 보면 빨라질 때가 있다. 반성해 보았다. 숲을 음미하기보다 둘레길을 얼마나 걸었다는 허영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앞질러 가는 사람들이 있을 때 보폭이 달라졌다. 뒤처져서는 안 된다는 본능적인 경쟁심이 숨어 있었다. 모두들 정상을 향해 올라갈 때면 나 혼자 둘레길만 걷는다는 게 이상해지기도 한다.
인생도 그래 왔다. 나의 발걸음에 맞추지 않고 남들이 치는 북소리 장단에 맞추려고 했다. 크고 작은 조직생활 속에서 위를 향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고만 싶었다. 공정하고 객관적인 체하면서 논쟁을 벌였다. 마음 문을 활짝 열고 정을 흘려보내지 않는 곳에서 논쟁은 허위였다.
공정이나 객관은 나의 가면 쓴 질시의 모습이기도 했다. 결국 논쟁에서 승리한 대가는 증오와 거리감이었다. 가벼운 이익으로 맺어진 관계는 물거품 같은 형식만 존재했다. 조직을 벗어나고 사무실을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그건 내게 습관과 타성에서의 해방을 의미한다.
내게 행복은 이런 게 아닌가 싶다. 연말이 돼도 빚진 건 별로 없다. 책상 위에는 신간 소설들이 수북이 쌓여있다. 주변에는 산책할 우면산, 대모산, 북한산들이 늘어서 있다. 아기자기한 예전의 골목길들을 지나가는 성곽길들도 새로 뚫려 있다. 그만하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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