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 시험에 합격하고 나서 개인법률사무소에서 일한 지 벌써 한 달이 돼간다. 배울 것이 많은 새내기 변호사로서는 변론요지서, 항소이유서, 준비서면 등을 쓰면서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다가 며칠 전 한가지 일이 나에게 강한 의문을 제기하게 만들었다.
같이 근무하는 직원이 수술로 몸이 불편해 형사 수사기록을 복사하러 가는 길에 내가 동행하게 됐다. 처음에는 ‘수습의 목적이 복사가 아닌데…’하며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모든 일에 있어 밑바닥부터 시작한다는 각오를 다졌다.
남부지방검찰청에서 항소심 사건의 1심 수사기록을 복사하는 일이었는데,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첫번째는 엄청난 기록량, 두번째는 복사기 앞에 서서 몇 시간씩 복사해야 하는 상황, 세번째는 복사지를 한장 한장 넘겨가며 참고인의 인적사항(주민등록번호, 주소 등)을 지운 후 그곳 근무자의 확인을 받아야 반출이 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오전 내내 두세 시간을 선 채로 복사를 마친 후 인적사항을 검은 펜으로 일일이 색칠했음에도, 그곳 근무자는 “(색칠한 부분이) 조금 비친다”며 페이지마다 포스트잇을 붙이며 재복사를 하든지, 칼로 인적사항을 오려내라는 것이었다.
기분이 너무 언짢았고 무엇보다 그런 상황이 이해가 안 됐다. 삭제 방법이 제시된 것도 없었고, 삭제 여부를 감별하는 기준을 알 수도 없었다. 관리자에 따라 검사 기준도 다를 수 있고, 무엇보다도 일일이 지우는 시간, 관리자가 일일이 확인하는 시간 등 시간과 인력 낭비가 참으로 엄청났다.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에 이런 상황에 대해 곰곰이 곱씹어 보았다. 이런 일을 왜 변호사 측에서 다 해야 하는지, 또 복사를 하러 오는 사람들(대부분이 소송대리인의 직원)이 인적사항을 보는 것은 왜 용인되는 것인지, 인적사항을 어떤 방법으로 지우라는 것인지, 삭제를 확인하는 기준은 뭔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누가 인적사항 삭제의 주체가 돼야 하는지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사무실에 도착해 이와 관련된 법이 있는지를 찾기 시작했다. 때마침 개인정보보호법과 관련된 논문들과 관련된 판례도 찾아 놓은 상태여서 의문점 해결이 한결 수월했다.
개인정보보호법, 시행령, 시행규칙 그 어디에도 개인정보를 받는 측에서 어떤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는 규정은 없었다. 즉 법원에서 수사기록을 복사해가는 사람이 복사물 안의 개인정보를 삭제해야 한다는 규정은 없었다(복사를 하는 자에게 개인정보의 처리 업무를 정보기관이나 정보보유자가 위탁했다고 볼 규정도 없었다). 오히려 개인정보처리자(업무를 목적으로 개인정보파일을 운용하기 위해 스스로 또는 다른 사람을 통하여 개인정보를 처리하는 공공기관, 법인, 단체 및 개인 등)가 민감정보나 고유식별정보 등 개인정보를 처리하는 경우에, 개인정보가 분실, 도난, 유출, 변조 또는 훼손하지 아니하도록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안정성 확보에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한다고 규정돼 있었다.
또한 최근에 나온 정보공개청구거부결정처분 취소 판결에서도 “CCTV 녹화물에 포함되어 있는 일반 통행인들의 얼굴을 공개하지 않더라도 원고가 휠체어 등의 시위용품에 대한 손괴행위를 확인하는데 지장이 없어 원고의 정보공개청구의 취지에 어긋나지도 않으므로, 피고(국가보훈처장)는 이 사건 녹화물에서 일반 통행인의 얼굴 등 특정인을 식별할 수 있는 개인에 관한 정보를 모자이크 처리 등의 방법으로 지우고 나머지 부분을 공개해야 한다”고 하면서 개인정보를 보유하고 있는 측(피고)에서 보호해야 할 개인정보(초상) 부분을 지우고 공개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밝혔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기록을 보유하고 처리하는 자가 비밀유지 의무를 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대법원 사이트에다 판결문을 신청할 때만 해도 대법원 측에서 관련자의 인적사항을 제거하고 나서 이메일이나 주소로 보내준다. 물론 판결문은, 사건이 진행 중에 있는 방대한 수사기록과 달리 그 양도 적고, 사건이 종료되어 이해관계 없는 제3자도 신청가능해 간편한 절차가 가능한 것일 수도 있다.
이에 반해 수사기록은 전산화가 난해하거나 비용과 시간 및 인력이 많이 들어 복사하는 것이 더 낫다고 치더라도, 복사를 하는 자(소송대리인 측)가 삭제와 정정의 주체가 돼야 하는 것인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혹자는 행정의 편의를 위해, 즉 비용과 인력부족으로 개인정보를 제공받는 자에게 정보삭제 의무를 부과하였다고 할 수 있으나, 보유하는 측에서 관리하는 것이 더 신속하고 정확한 처리가 가능하지 않을까.
수사기록의 인적사항 삭제의 목적이 진정 개인정보보호에 있다면 수사기록을 제공하는 측에서 미리 삭제하는 것이 제대로 개인정보를 보호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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