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생각대로 상대방의 행동을 조종하기 위하여,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대가 어떻게 행동해야할지를 세뇌시켜 이를 받아들이게끔 강요하는 것을 가스등 효과(Gaslight Effect)라고 한다. 잉그리드 버그만 주연 영화 ‘가스등(1944년)’에서 따온 말이다.
세계적인 오페라 가수인 앨리스가 자신의 집에서 살해되지만 경찰은 범인을 잡는데 실패한다. 유일한 상속녀인 조카 폴라(잉그리드 버그만)는 그레고리(찰스 보이어)와 사랑에 빠지고, 상속받은 저택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그레고리는 온갖 구실을 붙여서 폴라의 외출을 막는 한편 그녀를 정신이상자로 몰고 가기 시작한다.
사실 그레고리는 앨리스의 살인범이었고, 그녀의 값비싼 보석을 가로채기 위해 폴라에게 접근했던 것이다. 폴라는 그레고리의 주문대로 자신이 점점 미쳐가고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게 된다.
그런데 앨리스의 팬이었던 런던 경시청의 브라이언 경위(조지프 코튼)가 그레고리의 행동을 수상하게 여기고 의심하게 되면서 사건의 실마리가 풀린다. 밤마다 방 안의 가스등이 희미해지고 다락방에서 미심쩍은 발자국 소리가 난다는 폴라의 이야기를 듣고 사건의 전모를 추리해 낸다. 그레고리는 밤마다 근처의 빈집을 통해 폴라의 집으로 건너온 뒤 다락방으로 숨어들어 앨리스의 보석을 몰래 찾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폴라는 그레고리의 정체를 밝혀내고 자신을 되찾게 된다는 내용의 영화이다.
얼마 전 이혼소송의 1심에서 패소한 젊은 부인이 찾아왔다. 초점 없는 눈동자와 넋이 빠진 모습이 도저히 살아있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한숨과 함께 흘러나오는 목소리도 생기라곤 없었다. 핏기 없는 입술은 죽은 자의 그것을 연상케 하여 마주하고 있기가 섬뜩했다. 얼른 상담만 마치고 돌려보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부인은 나의 주저함에 아랑곳없이 힘겨웠던 결혼생활과 이혼 이유에 대해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차마 다 옮길 수가 없다면서 몹쓸 남편의 외도행각을 늘어놓는다. 20여년의 혼인기간 내내 남편은 주변의 여자들과 불륜을 저질렀단다. 남편의 회사 동료로 시작하여, 장성한 딸까지 불륜 대상으로 등장한다. 이어서 손아래 동서와 관계를 맺어 자식까지 낳았단다. 지금의 조카들이 남편의 자식이라는 거다. 급기야는 남편의 첫 성적 대상이 어머니였다는 말에 앞이 캄캄해진다.
아뿔싸! 이건 부부 둘 중에 하나 또는 둘 다 비정상이다. 1심 재판 기록을 살펴보았다. 남편은 여자를 망상장애 환자로 몰아갔고, 정신과 진료를 받은 적도 있었다. 남편이 희대의 바람둥이인지는 증거가 없다. 회사동료와의 불륜도 주장밖에 없다. 딸마저 진술서에서 엄마를 노골적으로 정신질환자로 취급하고 있다. 더구나 동서의 아이들에 대한 유전자 감식 결과도 의뢰인의 주장과는 상이하다.
부인은 남편의 병적인 애정행각을 남편으로부터 직접 들은 것이라고 하였다. 부인은 결혼생활 내내 과외 교사를 하며 돈을 벌었으나, 수입은 모두 남편이 관리하였고 자신 명의의 통장조차 만든 적이 없다고 했다. 부인은 한사코 이혼을 하고 싶어 하지만, 남편은 부인을 정신병자로 몰아가며 자신에게는 혼인파탄의 귀책사유가 없다고 주장한다.
재산문제가 남아있기는 하지만, 법적인 부부로 남는다고 해도 아내에 대한 사랑도 없고 정신적인 문제를 치료해줄 의향도 없으면서 굳이 이혼을 하지 않겠다는 남편의 태도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내 머리에는 영화 ‘가스등’이 섬광처럼 스쳐갔다. 남편이 ‘가스등 효과’의 사주자(使嗾者)일 수도 있지 않을까? 여자의 말이 진실이라면 그 억울함을 밝혀야 할 것이고, 병적인 질투 망상이라면 정신과적 치료를 받도록 도움을 주어야 할 것이다. 어느 것도 모른 체할 수 없는 것이다.
부인은 ‘망상증’에 대한 책도 읽었다고 한다. 혹시 ‘가스등 효과’에 대한 책도 읽었을 수 있고, 남편을 ‘그레고리’로 몰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부부의 ‘가스등 게임’에 내가 빠져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도 든다. 내가 경관 브라이언의 역할을 잘해낼지 아직 오리무중이다. 아마도 이 재판이 끝나는 시점이 된다 하여도 그 여인의 주장이 ‘망상증’ 탓인지 ‘가스등 효과’인지는 알 수 없을 것이다.
대등하지 않은 부부사이에서는 우세한 배우자의 조종에 의해 상대방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가스등 효과에 젖어 한평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점에서 이혼이란 자신을 되찾게 해주는 인생의 새로운 이정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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