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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회장 김선수 변호사소수자·약자 위해 싸우는 재야 활동가 변호사
엄상익 공보이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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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호] 승인 2012.05.15  10: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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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을 흔히 ‘민변’이라고 약칭한다. 과거 독재정권 당시 온몸을 던져 투쟁한 변호사들의 뜻과 사상을 잇고 있다. 많은 선배변호사들이 후배들에게 감동을 줬다. ‘법과 인간의 항변’이라는 책을 쓰고 감옥에 간 한승헌 변호사를 존경했다. 변론을 하면서 바른말을 하다 구속이 된 강신옥 변호사도 우러러보고 있다. 청계천에서 분신을 한 전태일을 가슴에 담고 평전을 쓴 조영래 변호사도 우상 같은 존재다. 재벌과 돈을 위해 뛰는 변호사도 있지만 소수자와 약자를 위해 자신을 던지는 변호사도 있다. 그런데 어떤 이는 민변을 철저한 좌파라고 매도하기도 한다. 회장 출신에게 접촉했지만 경계하고 말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이번에 다시 시도했다. 민변 회장인 김선수 변호사에 대해 알아보았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노무현 대통령의 사법개혁 담당비서관과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의 기획추진단장을 맡기도 했었다. 그런 경력이면 재야투쟁과 함께 정권을 잡은 입장에서 개혁을 시도한 양면성을 가지고 있을 것 같았다.
2012년 3월 15일 오후 3시경 김선수 변호사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서울교대 부근의 고깃집이 들어있는 5층의 자그마한 건물이었다. 작고 소박한 변호사실이었다. 그와 자그마한 원형탁자에 마주 앉았다. 양쪽으로 치솟은 두툼한 검은 눈썹에서 만만치 않은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법정에서 몇 번 봤던 기억이 떠올랐다.
“광화문에 가서 한 시간 동안 제주도의 해군기지 반대 1인시위를 하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요즈음 제주 강정마을 주민들이 구속이 많이 돼서 우리 민변 소속 변호사 두 명이 내려가 현장을 살피고 있습니다.”
일류대학 출신에 대통령 비서관까지 지낸 그가 1인시위를 할 수 있다는 건 만만치 않은 내면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는 변호사라는 직업관 자체가 다른 것 같았다. 단번에 질문으로 들어가도 될 것 같아 물었다.
“변호사를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두 가지 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문가로서의 상과 재야활동가로서의 상입니다.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의뢰인(그가 누구라도)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역할에 만족하는 것이 하나이고,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소수자와 약자를 위해 권력과 싸우는 역할까지 요구하는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그는 투쟁을 선택한 변호사가 틀림없었다.
“일반 변호사의 도덕성과 윤리에 대해 경고의 말을 하신다면 어떤 내용일까요?”
“돈을 받고 실체적 진실을 적극적으로 은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자체가 변호사 윤리에 어긋나고 정의에 반한다고 생각합니다. 변호사는 스스로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고 각자 그걸 다 압니다. 그걸 넘으면 파멸을 자초하는 거죠. 유혹이 많지만 항상 자신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 변호사들 사이 동업자 정신이 많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대형로펌까지도 고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그런 것인지 준비서면에서 상대방 변호사에 대한 인격모독적인 내용을 담는 경우가 많습니다. 변호사끼리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할 것 같습니다.”
“변호사는 돈 벌려고 하는 것 아닙니까?”
“돈이라는 게 구한다고 되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벌려고 마음먹는다고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요. 그게 목적이 되면 사람이 추해지죠. 저도 처음에는 작은 월급 때문에 고민했지만 이제는 최소한의 생활만 유지하면 행복하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변호사단체는 어때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정부에 대한 견제기능을 행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건이 터졌을 때 진상조사도 하고 비판하고 필요하면 즉각 성명도 발표하고 공익소송으로 적극적으로 문제화하기도 하고 나중에 그걸 기록으로 남기는 다양한 사명을 수행해야 합니다.”
이익단체인가 공익단체인가의 양면성이 있었다.
“대한변협과 민변의 역할분담에 대해 말씀해 주시죠.”
“저희 민변은 변호사들의 임의단체입니다. 오랫동안 민변 소속 변호사들이 대한변협 인권위원회나 법제위원회에 참가해서 일을 많이 해 왔죠. 대한변협의 문인구 협회장 당시 인권위원회에 조영래 변호사, 유현석 변호사, 최영도 변호사, 조준희 변호사 등 쟁쟁한 인물들이 포진해서 일을 했습니다. 요즈음은 그렇게 많이 들어가 일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요즈음의 대한변협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정부에 대한 비판과 견제의 기능이 미약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법원과 검찰에 대한 감시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도 의문입니다. 특별검사를 임명할 때 그 후보자를 대한변협이 추천해야 맞는데, 대한변협이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추천권도 행사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집행부가 로펌의 협의체로 구성된 것 같은 인상입니다.”
“민변이 추구하는 이념은 뭡니까?”
좌파라는 평가에 대한 그의 생각을 알고 싶었다.
“우리사회가 너무 오른쪽으로 경도됐기 때문에 좌파라는 색깔을 씌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회발전의 측면에서는 진보이지만 법률전문가단체로서 쟁점이 되는 사회현안, 그러니까 소수자나 약자를 위한 정상적인 법률적인 범주 내에서의 활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변호사법 제1조에 충실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사회의 좌우의 구별기준의 하나는 북한을 어떻게 보느냐인데 대북관계에 대해서는 어떤 의견을 가지고 계십니까?”
“3대 세습을 하는 북한정권에 대해 비판할 건 비판해야 합니다. 그러나 북한정권을 매도하는 건 평화통일의 입장에서 조심해야 할 사항입니다. 우리는 남북한 공존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차원에서 현 상황을 인정하고 현실성 있게 접근해야 한다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왜 제주도의 해군기지 설치를 반대하십니까?”
“저는 환경 하나만의 이유로도 충분히 반대할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귀포 앞바다의 아름다운 경치는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할 아름다운 유산입니다. 이 해군기지 설치의 이면에는 건설회사의 이권도 관련되어 있고 주민들의 동의도 제대로 받지 않고 번개처럼 몰아친 면이 있습니다. 구럼비 구간이 파괴돼서는 안 됩니다. 저희가 동강에 댐을 설치하는 것도 반대해서 결국 포기시켰습니다.”
해군기지 설치는 미국과 중국의 중간에서 미묘한 문제를 야기시킬 수 있는 문제였다. 더 나가지 않기로 했다.
“지난 정권의 대통령비서관을 하셨는데 현 정권의 문제는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국민과 소통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리고 지나치게 재벌과 기업 위주의 정책을 추진하여 99% 국민의 삶이 피폐해졌습니다. 많은 인권침해와 권력형 비리가 있었지만 제대로 수사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민간인 사찰 문제, 대통령의 형인 이상득 의원의 문제,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의 문제, 박희태 국회의장의 돈 봉투 문제 등 제대로 수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사항들에 대해 대한변협이 강력하게 대응해야 합니다.”
그는 확실히 일반 변호사들과 사고의 궤를 달리했다. 그의 본질을 알고 싶어 물었다.
“어떤 집 아들로 어떻게 성장했습니까?”
“진안의 깊은 산 속 세 가구만 사는 외딴 골짜기에서 살았죠. 산비탈에 화전을 일구고 마을의 논 몇 마지기를 소작하는 집 아들이었습니다. 멧돼지가 마당에 나타나는 곳이었으니까요.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 아랫마을로 이사왔는데 시골마을에서도 가난하다고 무시당하는 게 우리 집이었죠. 그런 집의 장남이 저였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가족이 서울로 올라와 서울역 뒤 만리동에 보증금 10만원짜리 쪽방을 얻어서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대한통운에서 하역노동자를 했고 어머니는 공장에 다녔습니다. 그래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제가 공부할 수 있도록 애를 쓰셨죠.”
그런 환경 속에서 그는 서울대 법학과를 들어갔다.
“대학에 들어간 후 저는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학동기들과 야학도 하고 산업현장에 들어가 노동자의 조직도 만들고 했죠. 저는 그런 것들이 지식인의 실천적인 삶으로 당연히 받아들였습니다. 대학의 본부서클에 들어 활동을 했고 전두환 정권 때 국풍 81 반대운동을 했다가 강제징집을 당해 군대에 갔다 왔죠. 다시 노동현장으로 들어가자는 제의가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그때 저는 노동자를 실질적으로 도와주는 나의 역할에 대해서 고민했습니다. 변호사가 되어 그 방향에서 시도해보자고 결심했습니다. 책을 싸들고 도서관으로 갔죠. 밖에서는 데모가 일어나고 경찰의 진압작전이 펼쳐지는 교정이었습니다. 역사가 바뀌고 있는데 이러고 있어도 되나 하는 회의가 많이 들었습니다. 특히 노동현장에 있는 친구나 감옥에서 나온 동료들을 보면 일주일 동안 손에 책이 잡히지 않았었습니다.”
그는 1985년 제27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그는 사법연수원을 졸업하고 바로 변호사가 됐다.
“어떤 변호사가 되기로 했습니까?”
“마음먹기에 따라 변호사 자격증을 가지고 폭넓게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회구성원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되는 사람이 돼야죠. 현대사회는 모든 분쟁이 법률과 입법을 통해 해결되기 때문에 변호사는 사회변화에 기여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변호사로서의 행로를 말씀해 주시죠.”
“연수원을 졸업하고 재야운동의 대부 격이던 조영래 변호사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습니다. 조 변호사가 하는 시민공익법률상담소를 부설기관으로 둔 남대문합동법률사무소에 합류한 거죠. 일반로펌에 비하면 월급은 적지만 보람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근로자들의 시간 외 수당을 청구하는 사건 같은 걸 맡아 처리했죠. 서울대 병원 직원 1000명과 지하철 공사 노동자의 집단소송을 맡아 처리했습니다. 옆에서 조영래 변호사의 행동을 지켜봤습니다. 신문에 발표할 칼럼을 쓸 때면 담배를 세 갑이나 피우면서 고민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습니다. 겉으로 보면 부드러운 글인데 이면에는 이런 고행이 있구나 하는 걸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조영래 변호사는 대한변협의 인권위원으로 인권보고서의 첫 호(1985년과 1986년 합본호)를 쓰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를 도와 1988년 인권보고서 중 신체의 자유부분을 썼던 기억이 납니다. 1990년 12월 조영래 변호사가 폐암으로 돌아가신 후 남은 변호사들이 시민종합법률사무소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민변의 사무총장을 겸하면서 조직의 살림살이를 하다가 참여정부가 들어서자 사법개혁비서관 및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 기획추진단장을 맡게 되어 정부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세상을 변혁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검찰을 어떻게 개혁하고 싶었죠?”
“검찰의 폐쇄적인 관료적 구조를 깨고 싶었습니다. 근본적으로 수사권과 기소권이 분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기소권은 불법수사를 한번 스크린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합쳐져 검찰에 독점되어 있으니까 법정에서 인권유린 주장이 나와도 검사는 수사를 합리화하는 데만 치중하는 겁니다. 수사권과 기소권은 서로 견제기능을 해야 인권이 보장된다고 생각하죠. 법원이 사후통제를 하는 셈인데 그것만으로는 약합니다. 그리고 폐쇄적인 관료구조 속에서 검사의 비리가 있어도 제대로 수사된 적이 없습니다. 대충 옷을 벗는 선에서 그쳤죠. 검사도 잘못을 하면 처벌을 받아야 국민들이 신뢰를 합니다. 그래서 참여정부 당시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를 만들려고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검찰 출신 의원들이 포진하고 있는 국회여서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그럼 결론적으로 실패로 보는 겁니까?”
“그래도 많은 부분이 개혁됐습니다. 피고인이 변호인과 나란히 앉아 검사를 마주보게 하도록 자리가 이동됐고 국민이 참여하는 국민참여재판제도가 도입되기도 했죠. 검사가 작성한 조서의 증거능력을 제한하려고 했습니다. 검사도 직접 법정에 나와서 증언을 하라는 취지였죠. 그런 중에 검찰의 집단반발도 있었죠. 위원회를 통과한 법안이 제출기관인 법무부로 넘어갔었습니다. 그런데 법무부가 다시 내부에 위원회를 만들어 결정된 법안을 손보려고 하기도 했습니다. 법무부장관이 사개추위 위원이었고 그곳을 통과했는데 다시 법안을 손보려는 의도가 순수하지 않은 거죠. 대검이 나서서 다른 방향으로 로비를 하고 검찰 출신 의원들이 비틀기도 했었습니다. 대한변협만 해도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검찰개혁에 대해 적극적이고 사법개혁추진위원회와 의견이 같았습니다. 그런데 회장이 바뀌고는 입장이 바뀌었습니다. 변협은 정부의 잘못된 정책을 비판하고 특히 검찰에 대해 감시와 견제기능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 것 같아 아쉬운 점이 많았습니다. 그 후로 사법개혁법안은 법사위에서 일 년 동안 잠을 잤습니다.”
“그래도 형사소송법 개정안이 통과됐지 않나요?”
“저는 그건 두 명의 국회의원의 공로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법사위 간사인 한나라당의 주성영 의원과 열린우리당의 이상민 의원입니다. 2007년 설연휴 때 주성영 의원이 법안 보따리를 싸들고 집에 가지고 가서 열심히 공부를 한 후 개혁의 방향이 맞다고 확신하고 밀어붙인 덕에 급진전된 거죠. 이상민 의원도 확신을 가지고 검찰국장을 불러 설득을 하고 그랬죠. 두 의원의 의기투합과 헌신으로 2007년 4월에 형사소송법 개정안과 국민참여재판법안이 국회를 통과한 겁니다. 이런 분들처럼 국회에는 정말 해야 한다는 의식을 가진 소신을 가진 의원이 있어야 합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습니까?”
“금년 5월이면 민변 회장의 임기가 끝이 납니다. 그 후에도 민변 노동위원회와 사법위원회위원회 위원으로 계속 활동하고 싶습니다.”
“본인은 화전민 그리고 대한통운 하역노동자의 아들이셨는데 자식들은 어떻게 키우십니까?”
“큰아들은 사법시험 준비를 하고 있고, 대학 2학년인 둘째 아들은 클라리넷을 배우려고 유학을 갔다가 지금 휴학하고 군에 입대했고, 막내딸은 고등학교 1학년입니다. 아들 딸 뒷바라지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고시제도는 우리사회의 변화를 이룩한 좋은 제도라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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