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의 법과 이데올로기’ 저자

이제는 상념하며 조금 차분히 말할 수 있다. 영화 ‘부러진 화살’이 우리에게 남긴 숙제는 무엇일까? 사람들은 ‘부러진 화살’에 몰려들어 무슨 공감을 했던 것일까? 한편의 ‘영화’였을 뿐이므로 그렇게 왁자지껄 흥행 이슈를 소비하며 지나가면 되는 것일까? 어느새 ‘부러진 화살’은 ‘부러진 논쟁’의 여운만을 남긴 채 서둘러 우리 곁을 떠났다.
이 영화(그리고 이 사건)의 줄거리는 이미 잘 알려져 자세히 기술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한 수학 교수가 1995년 입시문제의 오류를 지적해 재임용에서 탈락했다며, 새 특별법에 다시 기대를 걸고 2005년에 소송을 제기했다. 그는 항소심까지 패소했다.
영화는 이후부터를 다룬다. 2007년, 그는 그간의 재판 진행과정에 불만을 품고 석궁을 들고 담당 항소심 판사의 집 앞까지 찾아가 실랑이를 벌였다. 그 와중에 화살이 발사됐다. 물론 이제 그는 형사재판을 받아야 한다. 영화는 도저히 있을 법하지 않은 대사(시나리오 입문서에는 이런 대사는 실제 오갔던 말에서 따왔더라도 ‘극적 리얼리티’를 떨어뜨리는 금기사항으로 돼있다)로 21세기 대한민국 법정 공방을 어지럽게 묘사한다.
검사: “부러진 화살이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와이셔츠에 왜 피가 안 묻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변호사: “검사가 입증을 해야 되지 않습니까?”
판사: “아, 검사도 모른다지 않습니까? 사안의 실체에 대해서는 재판장이 판단합니다.”
피고인: “이게 재판입니까? 개판이지.”
영화 밖에서 논박이 계속됐다. 문화평론가 최수태는 피고인의 주장을 이렇게 요약했다.
“만약 박홍우 판사가 석궁 화살에 맞지 않았다면, 김명호 교수는 무죄입니다!”(프레시안, 2012년 2월 24일)
‘유죄(공소사실)를 입증하지 못하면 무죄’라는 이 익숙한 주장에 맞서 변호사 금태섭은 이렇게 반박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김명호 교수 측이 주장하는 사실 관계가 그대로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즉 석궁을 가지고 협박만 할 생각이었는데 옥신각신하다가 발사되었을 뿐이고 실제 상처를 입히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징역 4년이 결코 지나치게 무겁다고 생각하지 않는다.”(프레시안, 2012년 1월 29일)

영화가 직접 말하지 않은 것
나는 지금 누구의 편을 들어주려는 요량으로 뒷북치듯 그 법리를 따지고 싶지 않다. 나의 관심은 정작 다른 데 있다. 이 영화가 개봉된 후 다른 한편에서는 ‘영화가 사실이냐, 아니냐’를 놓고 때아닌 난전이 벌어졌었다. 놀랍게도 법원행정처장 차한성이 포문을 열었다.
“(영화는) 흥행을 염두에 둔 허구이며 사실을 호도하고 있다.”(연합뉴스, 2012년 1월 28일)
내가 보기에 사법부의 이 공식 발표는 마치 ‘엉클 톰스 캐빈’에 대해 “흥행을 염두에 둔 허구였으며, 사실을 호도했다”고 불만에 찬 목소리를 높이는 것과 다를 바 없어보였다.
사법부는 영화와 소설 등이 ‘거짓을 통해 진실을 추구하는 예술’이라는 것을 정말 몰랐을까? 그래서 그 많은 관객들이 영화와 사실을 구별하지 못하고 아우성을 치고 있다고 믿었던 것일까? 다행히 감독 정지영이 사법부 대신 우리에게 만족할 만한 대답을 해줬다.
“영화에서 제가 제기한 문제가 무엇인가와 관계없이 제 영화 속에 우리 사회가 공론화해야 할 상당히 중요한 요소들이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프레시안, 2012년 2월1일)
바로 그것이었다. 영화가 직접 말하지 않은 것, 아무나 쉽게 말할 수 없는 것, 그들을 대신해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 것, 그렇지만 분명히 그 실체가 있는 것, 우리는 지금 당장 그 아우성의 근원을 찾아내 ‘공론화’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는 한 우리의 논쟁은 아무리 화려해도 부러진 논쟁에 불과할 뿐이다. 만약 우리가 끝까지 이 일을 소홀히 한다면 과연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 대답은 사건의 주인공 김명호에게 직접 듣는 것이 좋을 듯싶다.

난해한 법치주의적 믿음과 그 역류
영화 안팎 어디에서나, 김명호에게는 아주 특별한 점이 있다. 그는 누구보다 더 ‘법’을 믿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헌법소원만 585건을 내는 등, 주로 판·검사들을 상대로 엄청난 송사를 벌였다. ‘법관을 믿을 수 없다’며 ‘법에 호소’하는 이 난해한 법치주의적 믿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것이 설령 편집증적 집착이라 해도 애초에 법에 대한 무한 에너지와 신뢰로부터 출발한 ‘법적 편집증’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화 ‘갱스 오브 뉴욕’에서는 인간사회의 이해관계가 어떻게 폭력적인 해결책(힘)으로부터 평화적인 해결책(민주주의)으로 진화해가는지를 냉혹하게 암시해준다.
거꾸로 이 영화 ‘부러진 화살’은 인간사회의 분쟁이 어떻게 평화적인 해결책(법치주의)으로부터 폭력적인 해결책(테러)으로 역류할 수도 있는지를 소란스럽게 상기시켜준다. 나의 주관적인 감상평이 아니다. 김명호 본인이 직접 그렇게 고백하고 있다. 그의 표현 그대로 인용한다.
“현재 법원의 판사들은 감히 누가 자기를 건드리겠느냐는 마음으로 국민을 한없이 착취한다. 미국처럼 총기소지가 유효하다면 그렇게 마음대로 횡포 부릴까 싶다. 막판에 도달했을 때 죽을 각오를 하고 그들을 해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우리나라 기득권층은 그런 두려움이 전혀 없다.”(tvN에 출연해 한 발언-마이데일리, 2012년 2월 2일)

성공한 테러리스트는 실패한 법치주의자
테러는 스스로를 테러 대상자의 논리를 빌려 정당화하지 않는다. 그저 일어날 뿐이다. 우리는 기껏 그 비극적 원인을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현 대한수학회 회장 서동엽은 “16년 전 대한수학회 집행부가 왜 사법부의 오류 여부 판단 의뢰를 회피했는지 그 배경을 알 수 없다”(인터넷 조선일보, 2012년 1월 31일)며 의아해했다. 애초에 김명호는 바로 그런 이해할 수 없는 사회적 ‘배경’ 때문에 (1997년 ‘사이언스’가 표현한 대로) ‘올바른 답의 비싼 대가?’를 치르며 좌절했다. 그것이 자신의 주장으로는 저항권, 다른 시각으로는 테러의 기원이었다.
누군가의 눈에는 ‘성공한 테러리스트’로 보일 김명호는 내가 보기에는 ‘실패한 법치주의자’다. 사실은 같은 말의 반복이다. 그 김명호는 자신의 못다 이룬 꿈을 영화 밖에서 이렇게 간략하게 표현했다.
“내가 법과 원칙을 지키면 윗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나의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인터넷 경향신문, 2012년 1월 27일)
‘윗사람들의 지배’가 아닌 ‘법의 지배’를 받고 싶다니? 이럴 수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바로 그런 세상이 아니란 말인가?! 우리 모두 완성된 현실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 법의 지배가 어쩌다 김명호의 현실 속에서는 그의 소중한 인생을 완전히 파탄시켜버린 신기루 같은 꿈이 돼버린 것일까?
아우성을 친 수백만 영화 관객들은 과연 무엇을 봤던 것일까? 그들 모두는 ‘영화는 허구’라는 사법부의 발표를 듣고 ‘아, 그렇지’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가상현실 속에서 빠져나와 다시 제정신을 차린 것일까? 그래서 우리 모두는 이 ‘실패한 법치주의자’와 ‘흥행을 염두에 둔 허구’를 깨끗이 잊고 다시 늘 해오던 방식 그대로의 익숙한 삶으로 되돌아가도 좋은 것일까?
이 영화는 순제작비 5억원, 마케팅과 프린트 비용까지 포함한 총제작비 15억원의 저예산영화로 손익분기점은 관객 50만명이었다. 그런데 255억여원의 총 매출액과 함께 총 관객 340만여명으로 종영했으니 대단한 성공이었다.
이렇게 폭발력을 가진 주제를 왜 대형 영화제작사들은 애초에 더 많은 제작비를 투자해 더 볼만한 영화로 만들어낼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을까?
어쩌면 법을 만들고, 집행하고, 판단하고, 변호하고, 연구하는 사람들도 혹 이런 대형 영화제작사들의 둔감한 감수성을 닮아있지는 않을까? 그래서 법치주의의 역사 속에서 대박을 터트릴 기회를 끊임없이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제발, 그런 것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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