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별 스트레스 정도를 비교할 때, 변호사라는 직업이 갖는 스트레스 또한 만만치 않을 것이다. 소송 자체가 주는 스트레스, 상대방이 주는 스트레스, 고객이 주는 스트레스, 회사 내 파트너 변호사가 주는 스트레스 등등. 변호사가 받는 스트레스의 상당 부분은 판사님들로부터 유래하기도 한다. 특히 자문보다는 송무를 주로 하는 변호사의 경우에는 피할 수 없는 부분이다.
변호사들끼리의 친목 모임 장소에서 빠지지 않고 나오는 화제는 서로의 특이한 소송경험이다. 그리고 특이한 판사를 경험한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쟁점파악을 너무나 분명하게 하고 와서는 당사자의 이야기도 경청하되 신속하고 합리적으로 소송을 진행하신 감동적인 판사님부터 소송내용도 파악하지 않고 무조건 조정만 강요하는 황당한 판사님까지 다양한 판사님들이 변호사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나에게 가장 많은 스트레스를 안겨준 한 판사님이 떠오른다. 그 분은 변호사 10년 경력 동안 내가 처음 대리해 본 소액사건의 담당판사님이셨다. 당사자 간에 서로 명예를 훼손했다면서 정신적 위자료를 청구한 사건의 피고를 대리하게 되었다. 첫 변론기일 오후 3시 30분 재판에 갔는데, 2시 30분 사건을 진행 중이었다. 진행이 좀 늦어졌나 보다 하고, 결국 5시가 조금 넘어서야 변론을 할 수 있었다. 그 바람에 그날 늦은 오후 및 저녁에 잡혀 있던 일정은 모두 취소! 다음 기일에도 또 오후 3시 재판을 5시 30분이 다 되어서야 변론을 마치고 6시경 법원을 나섰다.
그 다음 기일은 오후 2시였다. 점심식사를 서둘러 한 뒤 1시에 출발하여 1시 45분경 법정에 도착하여 2시 재판진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2시가 되어도 판사님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2시 10분, 15분, 20분… 시간은 흐르고, 먼저 들어와 있던 법원사무관이 다시 법관 출입구로 나갔다. 판사님을 모시러 가나 보다. 판사님을 모시러 가는 것으로 보인 법원사무관이 다시 들어온 후에도 한참이 지난 2시 30분이 되어서야 황급히 들어오셨다. 점심식사가 늦어졌나 보다 생각했다. 다음 기일에도 2시에 갔다. 또 2시 40분이 되어서야 판사님이 들어오셨다. 1시 40분경부터 법정에 와서 기다리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시계만 흘끔흘끔 쳐다볼 뿐 그 시간까지도 별다른 술렁임이 없이 조용히 재판을 받기 위해 판사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들 참 착하다’ 생각했다. 한편, 왜 3시 30분 재판을 5시가 다 되어서야 진행해야 했는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내가 담당하는 사건은 당사자간 감정이 안 좋을 대로 안 좋아서 조정가능성이 없다는 점이 기록상 분명하고 변론할 때마다 실제로 조정의사가 없다고 명확히 밝혔음에도 거듭 조정을 권하며 피고 본인이 꼭 기일에 오라며 한 기일 속행, 다음 기일에는 가능성도 없는 조정을 위해 조정실에 가서 무익한 조정절차를 거쳐 다시 법정으로 돌아오면 다시 한 기일 속행. 더 이상 주장할 것도 입증을 위해 증거 신청할 것도 없다고 변론하였으나 원고도 불출석했고 하니 한 기일만 다시 속행! 지금까지의 변론기일 진행상황을 보건대 원고도 더 이상 주장하거나 제출할 것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종결해달라고 애원해보지만, 그냥 속행!
다음 기일 원고가 출석하여 양 당사자 모두 더 이상 증거신청할 것 없다고 종결해 달라고 하는데도 또 속행!! 아…저…판사님! 더 이상 할 것이 없다니까요옷! 크게 부르짖었으나, “다음 기일은 3월 13일 오후 3시입니다” 단호한 판사님의 처분. 도대체 이 사건은 네버엔딩 케이스인가? 오래 전에 본 ‘사랑의 블랙홀’이라는 영화가 생각나기도 했다. 자고 나도 같은 날, 자고 나도 같은 날 속에 갇힌 남녀처럼 나는 이 소송사건에 갇히고 만 것인가! 로맨스야 매번 반복해도 재미나겠지만 할 말 없는 소송의 변론기일의 무한반복이라니,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모든 주장과 증거가 답변서 제출로 족했던 소액사건으로 7번 법정을 갔고, 갈 때마다 거의 오후 한 나절을 고스란히 허비했다.
소제기일로부터 1년여가 지난 3월 13일 오후 3시. 다시 법정을 향하면서 도대체 오늘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이 되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설마 오늘은 종결이 되겠지’하는 일말의 기대감으로 법정으로 들어섰다.
법대를 쳐다보는 순간, 지난 1년간의 소송과정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휘리릭 휘젓고 지나가면서 허탈감과 함께 묘한 배신감이 범벅이 되어 몰려왔다. 법대에 앉은 판사님이 바뀐 것이다! 그날 ‘더 이상 할 것이 없습니다’ 한마디 한 후 변론종결하고 돌아오는 길에 난폭하게 결심했다. ‘법관평가 꼭 하고 말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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